박석영 <재꽃> 감독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그가 필름에 채 담지 못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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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누군가의 첫사랑일지 모를 그리운 이름들에 대하여
② 한없이 로맨틱하면서도 지적인 배우, 만난 것 자체가 '행운'

시나리오 속 해별은

 박석영 감독의 영화 <재꽃>의 스페셜 포스터.

박석영 감독의 영화 <재꽃>의 스페셜 포스터.ⓒ 딥포커스


<재꽃> 속 해별은 가장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저 어린이로서의 아이를 명료하게 표현해내야 하는 역할입니다. 또 해별은 하담의 어린 시절인 동시에 홀로 거리를 걸어야 하는 외로운 소녀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그러면서도 처음 본 언니 하담의 손을 잡고 한 가족의 삶 속에 스며들 듯 들어가는. 갑자기 내리는 봄비처럼 모두를 적시는 그런 우리 모두의 아이여야 했습니다, 해별은. 아이들의 성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저에게는 어쩌면 가장 두려운 캐스팅이기도 했습니다.

배우 장해금의 캐스팅 과정은

 "해금은 멈출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장해금이란 배우는 소위 말하는 즉흥이나 애드립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주변을 느낀, 그 어떤 예민함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도 충만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해금은 멈출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장해금이란 배우는 소위 말하는 즉흥이나 애드립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주변을 느낀, 그 어떤 예민함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도 충만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딥포커스


3개월에 걸친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하나하나 아름답고 반짝이는 많은 배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저는 어떤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한 명당 총 20시간이 넘는 오디션의 과정을 거치면서도요.

그것은 이미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연기라는 역할 놀이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오염이라는 단어를 쓰고도 싶습니다. 눈물을 빨리 흘리는 것이 연기를 잘하는 것인 줄 어른들에게 배워버린, 그 훈련된 감정의 근육들이 너무 딱딱해서, 어떤 아역 배우들은 울고 웃으나 오히려 매 순간의 정서가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해별 역할을 장해금 배우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결국 한 가지였습니다. 최종 오디션 날, 저는 해금이에게 캐리어를 끌고 근처의 공원을 돌아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200m 정도 직진하여 왼쪽에 있는 골목의 끝 집'이라고 방향만을 정하고 오디션을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캐리어를 끌고 걷기 시작하던 해금은 우울하게 걷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하늘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꽃밭 근처를 지날 때 캐리어를 멈추더니 한참을 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오디션을 마치고 해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빠를 찾아가야 하는 일이 급한데, 왜 멈췄니?"
"꽃이 예쁘잖아요."

연기라는 일에 대하여

저는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연기를 꿈으로 가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에 연기라는 일의 대부분은 자신을 예쁘게 표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보고, 목격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가슴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일인 것 같습니다. 표현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친구들과 어른들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금의 이 문화가 아이가 아이를 연기하기보다 어른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의 아이를 연기하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재롱잔치일 뿐이지요. 아이가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줄 알게 되는 것은 역시 어른들의 연기에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어떤 선명함을 담은 연기에 대한 매혹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기에 삶은 불투명하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매우 복잡한 이유가 혼재된 카오스입니다. 선명할수록 거짓에 가깝고요. 그런 연기는 컷을 살릴 수는 있어도 역할을 살리지는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할이 살아있지 않고, 배우만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고민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기자란 꿈을 꾸는 많은 어린 친구들은 보통 지인의 소개가 아니라면 연기학원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연기 선생을 두고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아역 연기를 연습합니다. 감정의 진실성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전 그 친구들은 타이밍에 맞게 우는 것, 웃는 것, 똑똑하게 말하는 것을 먼저 배웁니다. 이미 자기 자신이 어떤 이미지인지 알고 있고, 또 어떻게 말할 때 어른들이 기뻐하는지를 명료하게 알게 된 친구들은. 역할의 깊이 안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나오는 감정에 오히려 당황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역 오디션이라는 일은, 긴 시간을 거쳐 배우들의 깊이와 중심을 목격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장해금이라는 배우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러한 조금은 다른 깊이와 중심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의 첫 촬영 날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해별이 새벽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첫 장면은 실제로도 영화 촬영 첫날이었습니다. 저는 왠지 우울한 뒷모습으로 걸어가는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제가 저의 불행 속으로 한 아이를 구겨 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상영 본에는 넣지 않았으나, 한 번 뒤돌아 어머니를 보듯 웃어 달라 부탁했던 장면이 있습니다. 환한 생기를 가지고 너무나 맑게 뷰파인더를 채우는 해금의 생기 어린 얼굴을 보며, 그 이후 모든 캐릭터를 다시 정리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그 생기야말로 한 맑고 용감한 아이가 온 가족에 가져다준 선물이었고 생명이었다는 것을, 저는 영화를 다 찍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장해금 배우에 대하여

 "결국 저의 꿈처럼 아름다운 춤을 담고 싶던 영화적 야심은, 이처럼 두 배우의 서로에 대한 배려에 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의 꿈처럼 아름다운 춤을 담고 싶던 영화적 야심은, 이처럼 두 배우의 서로에 대한 배려에 지고 말았습니다."ⓒ 딥포커스


해금은 멈출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장해금이란 배우는 소위 말하는 즉흥이나 애드리브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주변을 느낀, 그 어떤 예민함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도 충만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재꽃>에서 하담이 해별에게 탭 슈즈를 신겨주는 시퀀스는 매우 단순한 디렉션으로 이루어져야 할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해별이 신발을 신고 바로 아름답게 춤을 추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담 역의 배우 정하담은 해금이 신은 딱딱한 탭 슈즈가 아이의 발에는 아플까 봐 조심조심 신을 신겼고, 해금 배우는 맨발로 시멘트 바닥 위에선 언니 하담의 발이 또 안쓰러워 자신의 신발을 내어주었습니다. 결국, 저의 꿈처럼 아름다운 춤을 담고 싶던 영화적 야심은, 이처럼 두 배우의 서로에 대한 배려에 지고 말았습니다.

부디, 장해금 배우의 앞길을 가까이 보아주시고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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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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