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영 <재꽃> 감독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그가 필름에 채 담지 못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박석영 감독의 <재꽃> 포스터. <재꽃>은 <들꽃> <스틸 플라워>에 이은 박석영 감독의 '꽃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박석영 감독의 <재꽃> 포스터. <재꽃>은 <들꽃> <스틸 플라워>에 이은 박석영 감독의 '꽃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 딥포커스


저는 <재꽃>의 감독 박석영입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번 영화에서 제가 함께 작업한 배우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게 남기는 사적 기록이기도 하지만, 연기라는 예술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후일담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들이 <재꽃>을 본 관객들에게는 반가운 기록으로, <재꽃>을 본 관객들에게는 소중한 영화 길라잡이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시작은 '삼순' 역의 정은경 배우와 '명호' 역의 박명훈 배우입니다. (관련 기사: 욕망과 탐욕에 호통친 소녀... 가슴 먹먹한 <재꽃>)

시나리오 속 삼순은  

영화 속 어머니, '삼순'은 저에겐 매우 구현하기 힘든 캐릭터였습니다. 사실 삼순은 하담의 나이 든 모습일 수도 있고, <삼포 가는 길>의 백화일 수도 있는, 한때 길을 떠나봤던 과거를 품은, 그러나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한 어떤 안식의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러티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대사나 행위로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인 동시에 모두를 안아 내는, 그 세월의 품을 손끝 하나, 눈빛 하나에 표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순은 안식의 표상이었고, 반대로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내러티브를 진행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이미 많은 내러티브(이야기)를 담아주는 일종의 흙과 같은 역할로 존재해야 했고, 그 흙이 윤기가 있어야지만 나머지 역할들을 그 안에 심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재꽃>의 모든 캐릭터는 삼순이라는 비옥한 흙에 심겨있는 것이었기에, 안식과 따스함, 조건 없는 애정을 원형질적인 연기로 보여줘야만 하는 캐릭터였습니다. 즉, '그 어머니'를 연기하기보다, '어머니'라는 아이디얼, 즉 이상향을 연기해야만 하는 어려운 캐릭터였지요.

배우 정은경의 캐스팅 과정은
 
 "삼순은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이미 많은 내러티브(이야기)를 담아주는 일종의 흙과 같은 역할로 존재해야 했고, 그 흙이 윤기가 있어야지만 나머지 역할들을 그 안에 심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삼순은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이미 많은 내러티브(이야기)를 담아주는 일종의 흙과 같은 역할로 존재해야 했고, 그 흙이 윤기가 있어야지만 나머지 역할들을 그 안에 심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딥포커스


모든 영화의 캐스팅 과정은 항상 어렵지만 이번 경우,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실 배우분을 모시는 일은 저에게 매우 난감한 과제였습니다. 주변 동료 감독님들께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몇 분이 공통으로 정은경 배우를 추천해줬고, 단편 <아빠의 맛>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연기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 단편 속 정은경 배우는 딸과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역할을 연기했더랬죠. 그중 한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싱질'을 하던 엄마가 딸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어떤 감흥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놀랍게도 <들꽃>과 <재꽃>을 촬영한 이성은 촬영 감독님이 그 단편영화를 촬영했던 인연이 있었더라고요.

영화 안팎의 삼순에 대하여

처음 삼순의 집에서 온 가족이 모여 리딩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재꽃>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여러 공간 중에서 특히 삼순의 집은 <재꽃>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주요한 공간인데요. 저희 팀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몇 달에 걸쳐 그 공간을 미술적으로 채워나가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었습니다.

그 실제 집이란 로케이션 공간을 아무리 미술로 채우려고 해도, 세월이 담기게 노력을 해봐도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는 느낌이 컸거든요.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그 어떤 세월과 시간의 흔적을 선도하는 정은경 배우가 채워주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삼순의 의상을 입고 삼순의 집 툇마루에 앉은 순간, 모든 것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첫 장면에서 하담에게 월세를 받지 않고, 철기에게 머리를 씻으라고 타박을 하는 그 모습에서, 저는 연기 디렉션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었죠. 왜냐하면, 삼순이란 인물에 대한 선배님의 이해와 저의 이해의 폭이 너무 크게 차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등장 장면을 찍고 난 이후부터 저는 그저 '여기 앉아주시면 안 될까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들에게 뭔가를 먹여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아주 원시적이고 1차적인 디렉팅만을 했을 뿐입니다. 정은경이란 배우는 이미 누군가를 먹여주고 씻겨주고, 안아줘 왔던, 제가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안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어머니의 형상을 품고, 가지고 오셨거든요.

다시, 정은경 배우에 대하여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은경 배우가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그 삼순 역할이."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은경 배우가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그 삼순 역할이." ⓒ 딥포커스


은경 배우님은 그저 놀랍습니다. 저는 그 우아한 연기에 결국 영화 속에서 쓰지도 못할 수많은 순간을 찍었더랍니다. 카메라만 대고 있어도 생기가 넘쳐서 놀라웠고, 어떤 공간에 서 계셔도 세월의 우아함을 채워주셔서 아름다웠습니다.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은경 배우가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그 삼순 역할이'. 그러면서 이런 취지의 설명을 이어나가셨죠. 내 이름은 삼순이다. <재꽃>을 본 관객들도 내 이름을 모를 거다. 나 또한 햇볕 잘 드는 베란다에서 온갖 꽃을 키우고 싶고, 추운 날엔 따뜻한 방을 꽃들에 양보해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에서 조용히 산다. 베란다 대신 작은 꽃밭이 있고 예뻐해 주는 마음이면 언제든 피어 주는 채송화, 과꽃, 봉숭아가 있는 곳에 나는 산다. 소박한 가족, 소박한 꽃밭을 꾸리고 내 손이 닿는 것이면 의미가 되고 가족이 된다.

그 말씀은, 제가 설명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그 말씀에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저에게 삼순은 그렇게 누군가의 첫사랑 일지도 모르는 이름이자 체한 배를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손바닥같이 그리운 이름입니다.

시나리오 속 명호는

 "명호는 집착과 순수한 사랑이 공존하는, 역시나 매우 까다로운 역할이었습니다."

"명호는 집착과 순수한 사랑이 공존하는, 역시나 매우 까다로운 역할이었습니다." ⓒ 딥포커스


처음 시나리오 속 명호는 매우 우울하고 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스스로 비극이라는 삶의 무대에 서 있다고 믿는 역할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제가 밝고 당당한 해별의 모습을 형상화해 나가면서, 또 장해금이란 배우를 만나게 되면서, 이렇게 단단한 아이가 비극적인 인간을 만나는 것보다 어쩌면 어디나 있는 소시민, 아니 그보다 느슨한 삶의 흐름 속에 있는 인물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매우 만만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애처로운 이 남자는 어쩌면 '아버지 되기'가 아니라 처음 접해보는 조건 없는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고 혼돈에 빠지는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명호는 또한 자기 연민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순간부터, 사랑이라는 정당성 속에 온몸을 내던지는 인물일 뿐이죠. 그래서인지, 명호는 마치 첫사랑에 눈이 먼 것 같은 인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더불어, 처음 만난, 자기가 딸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출현에 그 아이의 더러운 양말을 보고는 새 양말을 사주기도 하지만 아이의 머리카락을 집어서 주도면밀하게 유전자 검사를 하는 양면적인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집착과 순수한 사랑이 공존하는 역시나 매우 까다로운 역할이었던 거죠.

배우 박명훈의 캐스팅 과정은

박명훈 배우를 처음 만난 것은 박정범 감독의 <산다>라는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명훈씨의 연기 안에는 티 없이 맑은 소년 같은, 첫사랑을 경험하는 소년 같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진실하게 표현하는 연기에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꼭 함께 찍어 보고 싶다고 프러포즈를 했더랬죠. 배우 입장에서는 어쩌면 <재꽃> 속 명호가 <산다> 속 명훈 캐릭터와 유사해 보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명훈이란 배우와 꼭 함께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명훈씨는 제 전작 <스틸 플라워>에서도 이상한 횟집 남자를 훌륭하게 연기해줬습니다. 내면을 알 수 없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역할을요.

이번 <재꽃>은 명호가 난생처음 해별이란 아이를 만나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더 박명훈이라는 배우가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영화 안팎의 명훈에 대하여

실제로 박명훈 배우는 박명호란 캐릭터를 준비하며, 빈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철기 역의 김태희 배우와 함께 주류 공장에서 배달 일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 배우가 영화 속 인물의 삶을 자기 몸으로 채워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명훈 배우가 그보다 먼저 더 중요하게 준비했던 것은 해별이란 캐릭터와 이를 연기한 장해금 배우에 대한 사랑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모든 현장에서 명훈 배우는 해별을 자기 아이처럼 돌보고, 삼순을 어머니처럼 돌보았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술 취한 연기에 대해 찬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매우 감사한 일이지요. 실제로 명훈 배우는 그런 모습을 연기할 때, 전혀 술을 드시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저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을 단 하나 꼽자면, 결국 사기를 당하게 된 명훈이 햇볕 아래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해금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 따스함이었습니다. 박명훈이란 배우의 얼굴에서, 마치 처음 태어난 아이를 팔에 안는 것 같은 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

다시, 배우 박명훈에 대하여 

실제로 배우 박명훈은 연극과 뮤지컬계의 베테랑입니다. 긴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연기해 온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인물을 찾아내는 방식은 어떤 기술이나 매너리즘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던 것을 전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화에는 실제로 쓰지 못한 해별과 명호의 이별 시퀀스가 있습니다. 해별은 명호에게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안아주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립니다.

그다음 장면에서 명호가 멀리 떠나는 해별을 보며 일어서서 울며 웃는 그 얼굴,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이 저에게는 조그마한 저를, 어렸을 때 놀러 뛰어나가는 조그만 제 등을 바라보던 제 아버지의 숨은 애정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박명훈 배우의 연기를, 마음을 관객들께서 오래오래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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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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