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 넘치는 캐릭터들과 파워풀한 서사는 타란티노의 작품들을 빛내왔던 주된 요소들이다. 하지만 캐릭터를 배치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배경, 즉, 공간의 구성과 활용은 그의 영화를 더욱 훌륭한 창작물로 인지하게 한다. 이번 글에서는 타란티노가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을 그의 가장 최근작인, <헤이트풀8>(2015)을 통해서 분석 해볼까 한다.

타란티노의 공간 활용 능력, <헤이트풀8>

<헤이트풀8>은 타란티노의 8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가장 크게 차별되는 점은 스토리의 거의 전부가 한정된 공간(오두막)에서 일어나고, 8명의 등장인물들이 이 작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영화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킬 빌 I, II>나 <장고: 분노의 추적자>,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도 폐쇄적인 공간(지하 술집, 상류층의 대저택, 트레일러 등)이 키가 되는 인물들의 중추적인 대결 장소로 쓰였지만 <헤이트풀8>처럼 지배적 배경으로 설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헤이트풀8>은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까워 보이지만(한정된 공간 구성에서 미스터리를 풀어간다는 점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Rope)와 비교해 봐도 좋을 듯하다), 등장인물의 동선과 그들이 공유 혹은 독점하는 오두막 안의 공간은 좀 더 복합적인 영화적 기능을 한다. 

<헤이트풀8>은 웨스턴 장르의 원형을 기본 프레임으로 한다. 시대 배경은 남북전쟁 직후. 제목 그대로 분노에 가득 찬 8인의 총잡이가 와이오밍의 설원을 배경으로 태풍으로 고립되어 묵게 된 한 잡화점(Minnie's Haberdashery)에서 하루 동안 정면대결을 펼친다. 8인은 7명의 남자–새로 부임한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월튼 고긴스 분), 은퇴 군인 스미더스(브루스 던 분), 과묵한 카우보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 분), 교수형 집행인(팀 로스 분), 잡화점의 멕시칸 관리인(데미안 비쉬어 분), 장교 출신의 현상금 사냥꾼 마키스 워렌(사무엘 잭슨 분) 그리고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커트 러셀 분)와 1명의 여자(존 루스가 교수형으로 처형 할 범인 데이지 도머구(제니퍼 제이슨 리 분))–로 구성되어 있다. 존 루스는 7명 중 몇 명이 데이지와 공모해 그녀를 탈출시키려고 계획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을 차출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혈투 끝에 결국 모두가 전멸한다. 

 <헤이트풀8>은 '퀸' 을 잡는 게임이다.

<헤이트풀8>은 '퀸' 을 잡는 게임이다. ⓒ (주)누리픽쳐스


영화는 황량한 설원의 전경 쇼트들을 거쳐 눈이 소복이 쌓인, 누군가 고목나무에 조각한 듯한 십자가에 박힌 예수 상의 클로즈업을 서서히 줌 아웃하며 시작된다. 줌아웃은 3분 가까이 되는 와이드 앵글의 장대한 롱테이크로, 엔리오 모리코네의 비장한 스코어와 함께 전달된다. 카메라가 거대한 십자가의 전신을 드러내면, 십자가 상 뒤로부터 마차가 달려온다. 이 마차에는 데이지와 존 루스가 타고 있다.

이들은 중간에 태풍으로 조난한 워렌 장교와 크리스를 태우고 마침내 '미니의 여인숙'으로 입성하게 된다. 마부를 포함한 다섯 명이 오두막에 머물고 있던 세 명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 목숨이 걸린 체스 게임이 시작된다.

목숨을 건 체스 게임, 킹은 누구?

'체스 게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8열로 구성된 게임의 보드처럼 8명의 인물이 (오두막 안에서의) 각자의 포지션에서 하나의 의무를 가지고 적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체스 게임의 승패가 '퀸'에게 달린 것처럼 이들은 여왕의 피겨인 '데이지'를 (각자의 이유로) 손에 넣으려 한다.

이들 중 가장 연로한 스미더스는 장기 말의 랭킹 중 가장 낮은 '폰'(pawn)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극 중에서는 시종일관 화로 앞에 놓인 체스 게임 판에 앉아만 있는 노인으로서 동선 없이 존재하는 인물인데, 데이지에게 관심조차 없지만 흑인에 대한 극한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워렌 장교에게 총 맞아 죽게 되는, '입으로 망하는' 인물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움직이지 않는 말로서 기능하지 않아 처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데이지를 지키는 존 루스는 그녀와 수갑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데이지의 도주를 막기 위해 루스가 자진해서 조치한 것이다) 항상 같이 움직이는데 그들이 차지하는 주요 공간은 '바' 이다. 시시때때로 싸우고 서로를 증오하지만 아이러니 한 것은 이들이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친밀한 프레임과 앵글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중 서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채워져 있는 수갑으로 인해 언제나 1피트 내의 간격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증오 가득한 로맨스(hateful romance)의 관계 지형에 가장 어울리는 곳은 역시 유혹과 냉소가 혼재하는 술의 공간, '바' 인 것이다.

워렌 장교는 '루크(rook)'로 기능하는 인물인데 체스 말 중에서 킹과 퀸을 제외하고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말 중 하나다. 옛날에는 타워, 혹은 마케스(marquess)라고 불렸다는데 실제 워렌의 이름이 '마키스(marquis)'인 것을 고려했을 때 타란티노가 이 체스 말을 염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워렌 장교는 사실상의 주인공이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액티브한 인물로써 특정 공간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폭넓게 움직인다. 시점 샷(point of view shot; POV 쇼트로 지칭)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승리를 차지하는 '킹'은 누구인가. 영화 말미에 모든 등장인물이 죽는 것을 고려했을 때 승자는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상의 승자는 보안관 크리스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는 영화 초반에는 스미더스와 함께 워렌 장교를 흑인이라고 공격하다가 워렌의 뛰어난 사살 능력(?)을 목격하고는 재빠르게 그의 편에 선다.

또한 우연찮게 워렌 장교의 신뢰를 얻어 그의 오른 팔로 승격되면서 영화의 중심인물이 된다. 워렌이 데이지의 패거리들을 처리하지만 오두막 지하에 숨어있던 데이지의 남동생(채닝 테이텀 분)에게 총격을 당해 몸을 쓸 수 없게 되면서 사실상 크리스가 오두막의 왕이 된다. 그는 데이지의 원래 숙명대로, 그녀를 목매달아 교수형에 처하고 자신도 데이지 패거리에게 당한 총격으로 눈을 감게 된다.

 사실상의 킹, 크리스 보안관

사실상의 킹, 크리스 보안관 ⓒ (주)누리픽쳐스


따라서 <헤이트풀8>의 인물들과 그들이 차지하는 공간들을 보면, 그들이 영화 안에서 맡은 기능 혹은 중요도를 점쳐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이 한정적 공간에서도 가장 큰 기동성으로 잡화점 곳곳을 누볐던 워렌과 스미더스. 그리고 그 사이를 누비며 넓은 동선을 차지했던 크리스는 1층에서 벌어졌던 독살과 총격에서 살아남을 뿐 만 아니라 지하에 숨어 있는 적까지 처단한다. <장고>에서의 공간적 재현을 분석 한 글 "Bodies in and out of places: Django Unchained and Body Spaces"에서 저자 알렉산더 오넬라는 타란티노의 작품에서 공간의 접근성(access to space)은 곧 그것을 가진 자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장고>에서 백인들의 공간은 그들이 (예.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캔디'의 2층 저택) 소유한 넓은 집 이외에도 말을 타거나,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는 등의 행동으로 높은 공간까지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고 이는 그들의 높고 역동적인 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흑인 노예는 지하의 방들을 차지하거나 동선이 거의 막혀 있는 부엌에 존재함으로써 그들의 낮은 계층과 권력의 결여를 은유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헤이트풀8>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적용 가능하다. 인물들의 행동반경은 그들이 서사에 얼마만큼의 동력을 기여하는가, 즉 서사적 권력과 비례한다.

왜 눈밭인가

마지막으로 <헤이트풀8>에서 눈 여겨 봐야 할 공간적 설정은 '눈밭'이다. 이 영화가 웨스턴 영화의 관습과는 다르게 황량한 모래밭이 아닌,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의 대부분이 오두막의 실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외부의 환경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꺼진 디테일도 다시 봐야'하는 타란티노의 영화라면 얘기가 다르다.

 <킬 빌>의 듀얼 신

<킬 빌>의 듀얼 신 ⓒ CJ엔터테인먼트


타란티노의 전작 <킬 빌>에서 쓰였던 클링건 속담의 카피처럼("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복수는 차가워야 맛있다), 차가운 눈은 복수의 상징이자 '더 브라이드'가 더 큰 악(bigger evil)을 처단하는 의식에 내려지는 찬사였다.

<헤이트풀8>의 오프닝 시퀀스의 눈 역시 '악'의 전멸을 응시하는 영화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나 긴 롱테이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설원의 전경은 앞으로 펼쳐질 두 시간 반의 통쾌한 의식에 대한 서곡이자, 타란티노의 전매특허 폭력 미학의 회화적 재현으로 보인다.

늘 그렇듯, 타란티노가 전달하는 폭력의 수위는 이번 작품 <헤이트풀8>에서도 눈으로 삼키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 영화적 과잉과 정밀함의 콜라주는 이 괴상한 아티스트의 다음 작품을 또 한 번 기다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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