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이라는 '남자 개인'이 아닌 '핍박받는 무산계급' 전체를 사랑했다. 짧은 생애를 모두 바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이라는 '남자 개인'이 아닌 '핍박받는 무산계급' 전체를 사랑했다. 짧은 생애를 모두 바쳐. ⓒ 메가박스㈜플러스엠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박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고작 스물셋에 지상에서 사라진 한 여성이 있다. 지극히 낡은 수사지만 '피기도 전에 꺾인 꽃'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아나키즘(Anarchism)에 바친 전 생애.

20세기 벽두.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부부가 딸을 낳는다. 이들은 책임의식조차 없었다. 낳은 딸의 양육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유년을 보낸 가네코.

겨우 9살 나이에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살던 친척 집으로 식모살이를 간다. 학대와 핍박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가네코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항거'에 눈을 뜬다.

10대 후반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 창가(娼家)에 딸을 팔려는 어머니 곁을 떠나 단신으로 동경을 향했다. 거기서 영어교습소를 다니며 만나게 된 것이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 일찍이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무산자의 자식이라는 가네코의 '존재'가 그를 아나키스트의 '의식'으로 이끈다.

그리고, 가네코의 나이 스무 살. 운명처럼 조선인 사내 하나를 만난다. 아나키즘에 기반해 독립운동을 하려던 피 뜨거운 청년 박열(1902~1974)이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을 동시에 비추는 이준익의 카메라

최근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절망과 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던 식민지시대, 20대 지식인 청년들의 삶에 카메라를 밀착한다. '제국주의의 심장' 동경에서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던 아나키스트 청년들. 즉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는 여러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세칭 '과학적 사회주의'가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기 전에 생겨난 것이라, 혹자는 아나키즘을 '원시 공산주의 이념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국가만이 아닌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일체의 '상부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또한, '과학의 틀' 밖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다소간의 낭만성과 과격성을 지니기도 하는 게 아나키즘의 특성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지하철에 폭탄을 투척한 에밀 앙리다. 그는 "왜 죄 없는 사람들에게 폭탄을 던졌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지상에 죄 없는 부르주아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아나키즘 운동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대답이다. 이 글이 '정치사상사 강의'도 아니니, 아나키즘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접자.

영화 <박열>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아나키즘에 경도됐던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 이질적인 한 사람이 끼어드니 그가 바로 '일본인' 가네코다. 이준익은 영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이 '여성 아나키스트'의 의식변화 과정과 에피소드를 스크린에 담아내고 있다.

 박열과 아나키즘 운동조직 '불령사'의 동료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아나키즘 운동조직 '불령사'의 동료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 메가박스㈜플러스엠


가네코와 박열이 꿈꾼 세상, 과학적이진 못했지만...

1920년대 초반 동경의 상황을 유추해 보건대, 과학적이고 정밀한 정치학습을 위한 텍스트가 흔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가네코와 박열을 포함한 청년들이 활동했던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는 제대로 된 강령과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조직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그들은 가슴 속에 맺힌 식민지 청년의 울혈을 반민족적 행위를 한 언론인을 몰매 놓고, 일본제국주의에 아부하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는 것 정도로 풀었다. 이는 불령사가 '순진한 수준'에 멈춰 있던 집단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저항과 항거의 형태를 "철없고 의미 없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최소한 일본에 빌붙어 같은 민족의 피와 땀을 착취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일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사용하지 않았기에.

'중국 상해에서 폭탄을 들여와 조선 민족을 압박하는 제1의 원흉 일왕과 왕자에게 던질 것'이란 계획은 그저 계획만으로 그쳤지만, 불령사의 기개 하나만은 높이 사줄만 하다. 사실 이런 게 앞서 말한 아나키즘 운동의 특징인 '낭만성'과 '과격성'이기도 하고.

영화 <박열>은 쉽게 잊어서는 안 될 '숨겨져 있던' 역사적 인물을 관객들 앞으로 소급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선 이준익 감독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영화 <박열>에서 배우 최희서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박열>에서 배우 최희서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경상북도 문경에 가네코가 묻혀 있다

하지만, 영화 <박열>이 흠결 없는 작품이라곤 할 수 없다. 가네코와 박열이 일왕 살해를 모의한 '대역죄'로 재판을 받는 법정 장면은 배우와 감독의 감정과잉이 지나치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족쇄에 묶여 '영화적 상상력'을 다양하게 발휘하지 못한 대목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은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아 열연한 최희서의 120점짜리 연기가 모두 상쇄시킨다. 나는 이 여배우를 91년 전 죽은 가네코의 부활이라 느꼈다. 극중 가네코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박열보다 아나키즘을, 아나키즘보다 핍박 받는 무산자들을 더 사랑했다.

"무산계급자는 연대를 통해서만이 이 비참과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를 옭아맨 국가와 정부, 종교와 규범 그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라. 그게 아나키스트의 길이다."

우울하고 가난했던 시대. 낭만과 과격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옥중 결혼했다. 그리고,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묻혔다. 새들도 힘에 겨워 쉬면서 넘는다는 '새재'의 고장. <박열>을 본 관객의 상당수는 문경에 가보고 싶어졌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네코의 무덤에 가게 된다면 아나키즘을 향해있던 그녀의 신념처럼 뜨겁고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들고 가야겠다.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아나키 인 더 유케이(Anarchy in the U.K)'를 추모곡으로 들려주고 싶다.

1970년대. 영국 여왕을 조롱하고, 가진 자들이 만든 제도와 질서에 침을 뱉던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Sid Vicious)도 가네코처럼 23살에 죽었다. 그도 아나키스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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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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