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로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재연에 나선 소극장 2인극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라이선스 극이다.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봇의 후원자로 부유한 제르비스 펜들턴이 나선다. 제루샤는 제르비스의 보살핌을 통해, 제르비스는 제루샤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 임혜영, 유리아, 강지혜 등.

ⓒ 곽우신


연극·뮤지컬 판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서 느낀다. 그래도, 분명히 이 판은 변하고 있다. 기존 남성의 시각에서만 표현되던 여성 캐릭터를 넘어선, 새로운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초연에 사랑을 받고 다시 돌아온 <키다리 아저씨>가 될 것이다. 남성 2인극 '포화' 상태인 이 판에서 남녀 2인극이 흥행하는 것은 새로웠다. 더 나아가 그 남녀 2인극에서 극을 전개하는 주체가 여성 인물인 것은 더더욱 새로웠다. 연극·뮤지컬 판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오늘(18일)부터 대구에서 지방 공연을 시작하는 <키다리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여성 캐릭터, 제루샤

대학로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재연에 나선 소극장 2인극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라이선스 극이다.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봇의 후원자로 부유한 제르비스 펜들턴이 나선다. 제루샤는 제르비스의 보살핌을 통해, 제르비스는 제루샤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 임혜영, 유리아, 강지혜 등.

ⓒ 곽우신


제루샤는 새롭다. 배움에 대한 갈망과 기쁨으로 가득 찬 제루샤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에서 자신이 배운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때로 논문 쓰는 법을 배웠다며 논문을 쓰듯 편지를 쓰기도 한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칭하며 얘기하기도 하고('레드 콤플렉스'로 가득한 한국이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다. 극 중 제루샤는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여성 캐릭터가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떤 세상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전의 많은 작품에서는 여성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욕망하는지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제루샤의 새로운 가치관은 사회적인 부분(참정권)으로 닿았다가, 다시 그녀의 꿈(고아원 운영)으로 돌아와서 연결된다.

제루샤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꿈뿐이 아니다. 그녀는 편지를 통해 제르비스에게 행복에 대해 말한다. 그 행복은 제르비스에게 와 닿고, 제르비스 또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성 인물에게 변화의 촉진제가 되던 여성 인물들은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남성의 시각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뉘던 여성 인물들이 일방적으로 영감을 주는 형태였다. 예컨대 이른바 '뮤즈'이거나 혹은 '구원자'이거나. 제루샤는 다르다.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관계는 서로 우정을, 혹은 사랑을 쌓아가며 '교류'한다.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관계에 대하여

대학로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재연에 나선 소극장 2인극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라이선스 극이다.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봇의 후원자로 부유한 제르비스 펜들턴이 나선다. 제루샤는 제르비스의 보살핌을 통해, 제르비스는 제루샤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 임혜영, 유리아, 강지혜 등.

ⓒ 곽우신


제루샤가 새로운 인물이었듯, 그녀와 제르비스가 가꿔 나가는 관계 또한 기존의 공연계에선 흔히 보기 힘든 방향이다.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관계 속에서는, 다소 권력과 맞물려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장면, 그 중에도 흔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작품은 그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판된다.

제르비스는 2학년이 된 제루샤가 샐리와 지미가 있는 농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말을 하자, 그녀를 자신의 농장으로 보내버린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말이다. 제루샤는 크게 좌절한다. 하지만 이후, 제루샤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힌다.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의 명령, 제르비스의 권유를 모두 거절한다. 그리고 제르비스의 말을 왜 거절했는지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제루샤가 직접 제르비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동일 인물인 키다리 아저씨에게, 제르비스가 했던 행실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제르비스가 휘두르는 권력과 제루샤에게 하는 명령이 '귀여운 질투' 정도로 미화될 수 있었다. 이전까지 많은 작품 속 서사에서는 그런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제루샤는 "명령만 하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생각을 바꿨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제르비스의 행동이 더 귀여운 질투 따위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여태껏 서사들의 패러다임과는 다소 다르고, 충분히 의미가 있다.

결말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대학로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재연에 나선 소극장 2인극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라이선스 극이다.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봇의 후원자로 부유한 제르비스 펜들턴이 나선다. 제루샤는 제르비스의 보살핌을 통해, 제르비스는 제루샤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 임혜영, 유리아, 강지혜 등.

ⓒ 곽우신


제르비스는 제루샤에게 청혼을 하고, 제루샤는 이를 거절하면서 '키다리 아저씨'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한 번만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런 제루샤의 요청을 승낙한다. 제루샤는 제르비스를 만나러 오고, 제르비스를 만나러 와서 키다리 아저씨와 제르비스가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깨닫고, 키스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둘의 관계는 매우 아름답게, '잘' 그려졌다. 예컨대, 제루샤가 왜 지미를 택하지 않고 제르비스를 택했는지 제루샤는 편지로 설명한다. 지미는 '어리다'는 이유였다. 제르비스는 얼굴도 모르는 제루샤였지만, 편지에 묻어나던 제루샤에 끌렸고, 제루샤는 펜들턴 가문이지만, 펜들턴 가문답지 않은 그의 미덕에 끌렸다. 둘이 사랑에 빠질 이유는 충분했다.

이 서사에서 아쉬운 결말은, 단순히 둘이 이성애 로맨스에 빠졌음이 아니다. 다만, 그 과정에 있어서, 제르비스가 '청혼'을 하는 것은(원작 소설을 따른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아쉽다.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사랑이 가득한 재결합과 키스는 관객들이 '둘이 결국 결혼을 하겠구나'라는 추론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연애와 결혼이 상징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예를 들어 제루샤 에봇은 이제 제루샤 펜들턴이 되는 것이다. 결혼이 가문 간의 결합, 새로운 사회로의 '편입'을 상징하는 사회에서 '그래서 결국 제루샤는 펜들턴이라는, 거대한 가문의 일원이 되는구나'라는 아쉬움이 한편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키다리 아저씨>의 끝은 새로운 결혼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제르비스 펜들턴은 펜들턴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제루샤가 강조했듯 기존의 펜들턴 가문 사람들과 다른 인물이다. 제르비스는 펜들턴 가문의 사람이지만, 어떻게 보면 펜들턴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읽을 수도 있다. 이성애 가부장 가족 제도에 묶이지 않던 제루샤 에봇과, 소속되었음에도 그들과 다른 행보를 걸어왔던 제르비스 펜들턴의 결합. 어쩌면 <키다리 아저씨>의 결말은, 가부장제를 유지해오던 이성애 결혼 제도에 약간의 흠집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힐링 뮤지컬이라는 말만으로는 아깝다

제루샤 에봇이 된 배우, 임혜영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 임혜영이 열연하고 있다. 강지혜, 유리아와 함께 이번 <키다리 아저씨> '제루샤 에봇' 역에 트리플 캐스팅된 임혜영은, 주로 대극장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다가 처음으로 소극장 작품에 합류했다.

ⓒ 곽우신


<키다리 아저씨>는 따뜻한 서사로 대학로의 제대로 된 '힐링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 뮤지컬이 관객들을 '힐링'하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힐링 뮤지컬'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뭔가 아쉽다. 이 작품이 품고 있는 건, 힐링 뮤지컬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더 커다란 무언가가 아닐까. 힐링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있으니까.

이 작품은 적어도 우리의 삶에 뿌리내린 진짜 삶, 진짜 행복 그런 것들을 가르친다. 가짜 행복과 가짜 삶이 아니라. 이 뮤지컬은 열심히 체제 안에서 돌던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체제 속으로 돌아가 돌릴 힘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조금 다른 삶을 보여준다. 오늘날 설파되는 가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의 진짜 행복을 이야기한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가 관객 각자에게 와 닿는 정도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무엇을 느끼든, 그 다양한 행복의 범주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뮤지컬이었다. 관객들에게 그리고 뮤지컬 팬들에게 '행복은 내 곁에 있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공연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반갑다.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든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 7월 23일, 성황리에 서울 재연 공연의 막을 내렸다. 이 <키다리 아저씨>가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돌아와, 더 많은 관객에게 '행복'을 알려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별이 아쉬운 관객들을 위해 오는 8월 18일부터 9월 3일까지 대구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대학로로 돌아온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지난 5월 25일,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열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재연에 나선 소극장 2인극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라이선스 극이다.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봇의 후원자로 부유한 제르비스 펜들턴이 나선다. 제루샤는 제르비스의 보살핌을 통해, 제르비스는 제루샤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신성록, 송원근, 강동호, 임혜영, 유리아, 강지혜 등.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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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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