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 바람을 가르는 소리여. 칙칙"

흔히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에게 '천의 얼굴을 가진'이라는 (진부한) 수식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상투적인 표현을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배우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박철민'처럼 말이다. 그의 얼굴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그의 연기에는 그 4가지 감정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된다. 그 정도로 박철민을 '천의 얼굴'이라 부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순히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서 그 감정들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사칙 연산을 무한대로 해낸다. 그래서 박철민의 연기는 '깊다'.

놀랍게도 그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그는 '연기'가 너무도 하고 싶어서 극단을 찾았고, 그 세계를 전전했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2004)에 가오리 역으로 출연했던 박철민은 권투 동작과 함께 내뱉는 익살스러운 대사를 단박에 유행어로 만들며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맡으며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여직원과 그 아버지의 고독한 싸움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2013)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천의 얼굴' 박철민

 MBC <군주>에 출연 중인 박철민. 배유람 배우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이다.

MBC <군주>에 출연 중인 박철민. 배유람 배우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이다. ⓒ @gaeddac


최근에는 MBC <군주>에 출연 중인데, 세자 이선(유승호)의 스승인 우보 역을 맡아 특유의 애드리브를 발휘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8년 동안 여섯 작품(영화 <4교시 추리영역>(2009),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2011), SBS <무사 백동수>(2011), MBC EVERY1 <상상고양이>(2015), 영화 <조선마술사>(2015))을 함께 했던 인연은 곧 찰떡 궁합으로 이어져 수목 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군주>에서의 모습은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보여줬던 악역(이조판서 김의교)의 그것과는 180도 달라 눈길을 끈다.

이처럼 박철민의 연기는 다채롭다. 한때 '코믹 연기'로 규정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연극 무대에서 다져온 연기력으로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과감히 돌파해냈다. "어쨌든 행복을 느끼는 일을 이 나이에도 하고 있고, 나의 장단점을 볼 줄 아니까 참 다행이지 않나?"(관련 기사: 'B급 배우' 자처하는 박철민, "난 잡놈 중 잡놈")라고 말하는 박철민은 상업 영화, 독립 영화, TV 드라마와 예능(SBS <정글의 법칙-와일드 뉴질랜드>), 연극 무대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박철민, '커튼콜'의 희노애락 영화 <커튼콜>에서 철구 역의 배우 박철민이 6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박철민 ⓒ 이정민



"나는 까부는 게 좋다. 익살부리고 오버하기도 하고 그러면 더 신난다. 그러다 최고의 지점에서 행복하게 끝난다. 슬픈 장면도 마찬가지더라. 하면 할수록 더 슬퍼진다. 아파지고 더 먹먹해지고. 이런 감정들이 아주 훌륭한 경험이지만, 자주 하지 말자는 생각도 했다."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중에서

박철민의 연기, 그 본질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어떨까. 대중들은 왜 박철민이라는 배우, 혹은 박철민이라는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감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자면, 그건 아마도, 그가 (남들은 쉽사리 외면하고 마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진솔한 사람이며, 그것을 대중들과 교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솔직함'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러한 '능력'은 대중들과 부대끼고 호흡해야 할 배우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가족> 출연은 박철민에게 큰 도전이었다. 단순히 '삼성과의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실화'였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주로 '밝은' 연기를 해왔던 그가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고, 결국 감동적인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투자를 받기 어려웠던 저예산 영화의 주연 배우, 그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였다면 흥행에 더욱 도움이 됐을 거라며 자책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배우 박철민

 전태일 40주기 홍보대사를 맡았던 박철민

전태일 40주기 홍보대사를 맡았던 박철민 ⓒ 이선옥


"저 같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 되긴 합니다. 막살고, 딴따라로 사는 사람인데…. 저보다 더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들이 이 사업을 함께 하면, 더 많이 널리 알릴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저라도 할 수 있다면 하겠습니다. 인기 없는 대신 발품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전태일다리 이름짓기 범국민캠페인 '808행동' 선포식)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박철민. 그는 지난 2010년에는 전태일 40주기 홍보대사를 맡기도 했다. 당시 "내가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았던 인물, 정서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던 인물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에서 참여하게 됐다고 이유를 밝히면서 최선을 다해 전태일의 '정서적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10년'이 정치적으로 어떤 시기였는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그 '암흑기'를 떠올리는 데 무리가 없으리라.

한편, 박철민은 2017년 6월 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무대에 올랐다.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한열 열사의 추모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고, 박철민은 사회를 맡았다. 그는 이한열과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이 열사는 중2 때 같은 반 친구였다. 그는 2분단장, 나는 3분단장이었다. 6월이 되면 부끄럽게 사는 제 인생을 반성하면서 이 열사를 한없이 그리워한다." 이한열과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또 한 번 부끄러워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박철민의 진솔한 고백(?)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박철민의 진솔한 고백(?) ⓒ JTBC


"이번 선거 때 대통령님을 못 찍었다. 마누라와 많이 싸웠는데 끝나고 나서 2주일 만에 제가 술 한 잔 먹고 '여보, 당신의 선택이 옳았어. 멋졌어'라고 말하고 사과했다."

지난 6월 2일 박철민은 서울 강남구 구립서울요양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치매국가책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문 대통령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코미디언 김미화와 함께 사회를 맡았던 그는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찍지 못했지만, 2주일 만에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던) 아내에게 사과했다고 고백(?)하며 문 대통령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솔직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요양원에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박철민의 개인사와 연결돼 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10여 년 동안 치매를 앓고 있었고, 이 때문에 자연스레 치매라는 병에 대해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치매 홍보대사를 맡으며 '치매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일상 속의 직접적인 경험과 치매 환자가 65만 명(2015년 기준)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 등은 그에게 치매라는 병이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병이라는 깨달음을 줬을 것이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길

 쿠키뉴스 스토리펀딩 치매편 영상 캡처

쿠키뉴스 스토리펀딩 치매편 영상 캡처 ⓒ 쿠키뉴스


"노래 부르기 좋아하시고, 그림 잘 그리시고. 그래서 더 애틋합니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너무나 사랑스럽고 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시죠. 그렇지만 예전에 가족과 함께했던 기억들, 추억들을 간직하지 못하고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지난 26일, 박철민은 저소득 치매 노인들의 지원을 위해 4천만 원을 기부했다. 치매학회 홍보대사로 선정돼 받은 활동비를 전액 기부한 것이다. "어머니 덕분에 받은 돈인데 당연하다"던 그는 치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역할을 재차 강조했다. 배우 박철민, 인간 박철민. 그의 '깊은' 연기의 뒤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또, 중학교 동창 이한열을 떠올리면 밀물처럼 몰려오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 사회 속에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있었다.

천 명의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보다 한 명의 '배우'가 탄생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의 연기에는 그가 살아온 굴곡진 인생과 그 안에서 생성된 '세계관'과 '가치관'이 오롯이 담기기 때문이다. 그건 '스타'를 찍어내는 '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물며 그가 '천의 얼굴'을 지녔다면 그 가치가 어떠하겠는가. 부디 천의 얼굴의 지닌 배우 박철민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져서 그가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일들이 더욱 원활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 글이 쇠털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박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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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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