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리고당 더 무비>의 포스터. 잠깐 소비하고 휘발되는 그런 '19금' 영화가 아니다.

영화 <올리고당 더 무비>의 포스터. 잠깐 소비하고 휘발되는 그런 '19금' 영화가 아니다. ⓒ (주)농담


섹스 직후, 커플 남녀의 몸이 뒤바뀌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체인지>). 결혼을 앞둔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혼전 '금욕'을 요구한다(<금딸>). 어느 호텔 방, 성 접대를 하던 여성이 갑자기 남성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지시자>). 수줍은 성격의 건달 남자, 매일 블랙커피를 주문시켰던 다방 여종업원과의 미래를 꿈꾼다(<블랙커피>). 그리고 '꽃뱀' 여성과 달콤한 하룻밤을 보낸 남자에게 다른 두 남자가 들이닥쳐 협박해 댄다(<가면>).

짤막하고 짜릿한 사건들이 모두 한 명의 남자 '근혁'(김남우 분)과 열 명의 '미정'에게 일어난다(개별 단편이지만 캐릭터의 이름은 동일하다). 지난 15일부터 디지털 케이블 TV 및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최초 개봉 서비스를 시작한 <올리고당 더 무비>(아래 <올리고당>)는 이렇게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다. 장르마저 각양각색이다. '19금'을 표방한 만큼 코미디와 스릴러는 기본이요, 멜로와 판타지 등 의외의 장르까지 두루 섭렵했다. 나머지 이야기도 다채롭긴 마찬가지다.

스토킹을 당한 매력적인 여성, 형사에게 잡힌 스토커의 정체가 의문스럽다(<스토커>). 평온한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남편은 섹시한 직장 여성 상사에게 매력을 느낀다(<집사람>). 온라인 도박 빚을 구하려 예지 능력을 지닌 남편의 옛친구를 찾아간 커플에게 놀랄만한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예지자>).

가사면 가사, 재력이면 재력, '밤일'까지 완벽해 아내를 대만족 시켜주는 남편에겐 사실 놀랄만한 비밀이 감춰져 있었다(<완벽한 남자>). 그리고, 자살 여행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된 남녀의 사연까지(<여행>).

단순하게 'IPTV'용으로 소비되고 휘발되는 '19금' 영화로만 보면 서운하다. 성인 웹툰 작가 '악어인간'의 원작 <올리고당> 중 10가지 에피소드를 골라 영화화했다. 총 103분에 달하는 이 옴니버스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쉬이 만날 수 없는 시도다. 그리고, 이 <올리고당>은 단편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거칠거나 둘쑥날쑥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기우로 만든다.  

19금이란 공통분모? 의외의 장르 종합선물세트

 영화 <올리고당>의 한 장면. 개별 에피소드마다 다른 장르임에도 안정감이 돋보인다.

영화 <올리고당>의 한 장면. 개별 에피소드마다 다른 장르임에도 안정감이 돋보인다. ⓒ (주)농담


꽤나 공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원작의 이야기 얼개는 그대로 가져왔다 하더라도 개별 에피소드마다 다른 각 장르적인 안정감은 기대 이상이다. 이 <올리고당>의 노진수 감독은 이미 비슷한 형식의 옴니버스 영화 <나인틴 : 쉿! 상상금지!>를 연출했던 장본인이다. 그 작품이 젊은 세대의 성에 천착했다면 <올리고당>은 '19금' 상상력을 전제로 장르와 소재를 좀 더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 명쾌하다. 어렵지 않다. '노출'도 있고, '반전'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선도 확실히 잡고 간다. 이 짤막한 단편들 속에 어떤 작품은 장르적 쾌감이, 또 어떤 작품은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또 몇몇 작품은 더 긴 이야기로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게 다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연출에 기반을 둔다.

이를테면 이런 식. 남녀의 몸이 뒤바뀌는 <체인지>는 어쩌면 식상한 소재다. 연기 톤도 다소 과장돼 있다. 그렇다면 어떤 에피소드로 채울지가 관건일 수밖에 없다. 의외로 <체인지>는 부서 회식 후 여성을 탐하려는 남성 상사에게 '빅엿'을 먹인 뒤, 남자 주인공이 여성들의 상대적인 육체적·사회적 어려움을 깨닫게 되는 교훈극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청춘남녀의 연애극인 <금딸>이나 유부남의 일탈 욕구에 일침을 가하는 <집사람>도 같은 범주다.

의외의 수확들은 스릴러 장르에서 출몰한다. 타란티노식 시점 전환이 돋보이는 <지시자>나 치정극의 설정을 강하게 밀어붙인 <가면>, '예지'라는 판타지적 설정에 인간의 물욕이란 주제를 덧댄 <예지자>가 그런 경우다. 강력한 설정이 효율적인 공간, 인물 활용을 아이디어를 강화하는 장르 단편의 좋은 예랄까.

여기에 서정성과 반전을 결합한 <블랙커피>나 마치 "정통 멜로도 가능하다"를 보여주는 듯한 <여행>, '한남'이란 화두로 연결될 수 있는 생활형 소재를 SF 코드로 멋지게 마무리한 <완벽한 남자>도 의외의 재미를 던져준다.

더욱이 이 바탕에 한국사회의 남성 중심주의에 비판이나 남성 중심 서사에 대한 반발심리도 엿보인다. 비록 간간이 등장하는 여성 배우의 노출은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올리고당>의 발칙한 실험은 '핑크 영화'의 전통을 한국형으로 비트는 감독의 시도와 완성도 있는 '19금' 콘텐츠를 성공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만남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형 핑크무비 혹은 장르영화의 부활을 위하여

 영화 <올리고당>의 한 장면. 이처럼 '건강한' 장르 영화가 이후로도 나오기를 바란다.

영화 <올리고당>의 한 장면. 이처럼 '건강한' 장르 영화가 이후로도 나오기를 바란다. ⓒ (주)농담


노진수 감독은 지난 2015년 <친절한 가정부>로 일본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수상한 언니들>은 이듬해 포비든존에, 신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도 올해 유바리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각기 '19금'이란 공통점 외에 판타지와 스릴러, 퀴어와 멜로를 경유하는 드라마들이었다.

<올리고당>이 다채로운 장르성을 띨 수 있었던 이유도 노진수 감독의 이러한 다채로운 경력에 기인한다. 서정성 짙은 <하늘을 걷는 소년>으로 데뷔해 호러에 가까운 <노르웨이 숲>,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빠가 돌아왔다>, 스릴러 <피해자들> 등을 연이어 연출한 노진수 감독은 일찌감치 <해변으로 가다>의 각본과 <해적 디스코왕>의 각색자로 충무로에 발을 들인 인물이다.

앞서 <연풍연가>의 미술팀과 <텔 미 썸딩>의 제작부를 거쳐 각본을 쓰기 시작한 그는 <친절한 가정부> 이후 이른바 '핑크 무비'에 경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편없는 '19금' 성인영화가 아니다. 일본 핑크 무비는 '19금'과 '정사 신'을 공통분모로 삼은 채 감독이 소재 제한 없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전통적인 장르다.

이 핑크 무비에 가까운 영화들을 가지고 노진수 감독은 의외의 완성도와 장르성을 한국 저예산 시장에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올리고당>이 10편의 각기 다른 다채로운 색깔과 나름 균질적인 완성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올리고당>의 탄생은 IPTV와 디지털 플랫폼의 틈새 영역인 '19금 콘텐츠' 시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올리고당>의 제작사 농담은 웹툰을 기획, 제작한 투유드림의 성인 콘텐츠 전문 레이블로 웹툰 IP(intellectual property rights, 지적 재산권)를 기반으로 성인 콘텐츠 기획제작사를 표방했다.

질 낮은 작품들이 범람하면서 시장 자체를 죽이고 있는 이 틈새시장에 웰메이드한 작품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으로 차기작 구상도 이미 돌입했다. 성인 웹툰 시장에서 2천만 뷰를 달성한 악어 인간 작가의 옴니버스 성인 웹툰을 영화화한 <올리고당> 역시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핑크 무비의 본진인 일본 영화계는 최근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를 내놓아 이목을 끌었다. <두더지>의 소노 시온,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유키사다 이사오, <링> 시리즈의 나카다 히데오 등 거장 감독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 한국에서도 공개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잠재적인 수요와 시장을 충분히 갖춘 이 '19금' 시장과 거장 감독들과의 조우야말로 '핑크 무비'와 작가주의의 전통을 잇기 위한 일본영화계의 긍정적인 시도라 할 만하다.

<올리고당>이 그러한 작가주의 노선을 표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장르물의 종합선물세트에 가깝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반가운 것이 작금의 한국영화계 아니겠는가. 대형 텐트폴 영화에 경도된, 그 극단에 질 낮은 19금 영화가 양산되는. <올리고당>의 출현이 신선한 건 그래서다. 그리고 이 노진수 감독은 차기작으로 호러영화를 준비 중이다. 역시나 죽어가는 '호러영화의 부활'을 외치면서. <올리고당>에 이은 건강한 장르 영화의 출현을 기대한다.

올리고당 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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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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