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의 오프닝 시퀀스, 강간을 당한 미셸.

<엘르>의 오프닝 시퀀스, 강간을 당한 미셸. ⓒ 소니 픽처스


강간은 영화가 다루기 극도로 꺼려하는 대상이다. 지금까지도 여기에 견줄만한 금기는 아동살해 정도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자. 당신은 강간을 제법 비중 있게 다루었던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강간 장면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영화가 아닌 강간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 말이다. 누구도 쉽게 여러 가지 제목들을 꺼내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살인, 심지어는 대규모 학살인 전쟁까지 스펙터클의 장치들을 통과해 육체적 쾌감으로 전환되어 전시되는 상황이 너무 익숙한 우리 세대에서도 강간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강간은 실제 하는 여러 가지 폭력 가운데서도 무척이나 특수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폴 버호벤의 최근작 <엘르>는 그런 면에서 또 다시 금기를 건드리고 있다. 따라서 <엘르>라는 영화가 강간을 다루는 특징을 간단하게나마 이야기 해보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 일 수 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극장 상영 중인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유리집기가 깨지며 여성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남성의 헐떡이는 호흡소리가 이어진다. 한 여성이 마스크를 쓴 괴한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다. 마지막 거친 숨소리를 한 번 몰아쉬고 단지 수십 초 만에 여성을 덮쳤던 괴한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여성의 스카프 조각으로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대강 훔쳐내고 유유히 도주한다. 물론 이 피는 강간을 당한 여성의 음부에서 발생한 출혈이다.

그런데 이 여성, 좀 이상하다. 그녀는 강간을 당한 후에 경찰에 신고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다. 강간과 폭행의 충격과 공포로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다. 그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차분하게 깨진 유리집기들을 치우고 담담하게 음부에서 새어나온 핏물을 비누거품으로 흩트리며 태연하게 목욕까지 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충격을 받는 이유는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폭력 상황을 어떠한 설명도 없이 오프닝 신으로 배치됐기 때문이 아니다. 주인공인 이 여성(미셸)이 강간을 당한 후 보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 때문이다.

 비누거품으로 자신으로부터 나온 핏물을 흩트리는 미셸

비누거품으로 자신으로부터 나온 핏물을 흩트리는 미셸 ⓒ 소니 픽처스


폴 버호벤은 이 충격적인 오프닝 강간 신을 롱 쇼트들로 무미건조하게 찍었다. 카메라는 그저 문간에 서서 첫 강간을 당하는(영화가 진행되며 미셸은 동일 인물에게 강간을 몇 차례 더 당하게 되며 심지어 수행되기도 한다) 미셸을 훔쳐본다. 따라서 보는 이들은 어떠한 맥락 설명도 없이 벌어지는 강간에 조금의 감정도 이입할 수 없으며 그저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강간당한 뒤 잠시 멍하게 앉아있는 미셸을 멀찌감치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 우리는 이 여성이 강간 행위를 통해서 갑자기 세상에 툭 던져진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거나, 또는 강간을 통해 지금 막 태어난 존재라는 느낌까지 받는다.

이런 강간 행위에 대한 계산된 시간적 배치와 의식적인 거리감은 <엘르>가 강간을 통해 접근하는 미셸에 대한 일종의 관찰기觀察記 임을 강조한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카메라는 이제 미셸을 쫓아다니며(정말로 카메라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미셸과 단 한 번도 격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평범한 3인칭 관점이지만 우리는 영화의 모든 것을 오로지 미셸을 '통해서' 봐야만 한다) 미셸과 함께 주변인물들을 만남으로 그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엘르>의 첫 번째 충격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전달된다면 두 번째 충격은 미셸이 태연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강간범을 찾는 일종의 게임을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부터다. 미셸은 이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 스스로 강간 피해자로서 정체성을 거부한다. 여기서 거부는 이중적인 거부이다.

첫 번째로 그녀는 강간당한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기를 거부한다. 즉 공식적인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년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벌였던 연쇄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그녀는 그 연쇄살인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회자되는 것을 막고 싶다. 따라서 그녀는 의식적으로 경찰을 회피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는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태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반복해서 강간을 당하면서 스스로 느꼈던 알 수 없는 흥분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셸이 이처럼 피해자로서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영화가 거두는 효과는 주인공 미셸에게 벌어진 강간이라는 형사 범죄에 공권력이 개입할 여지가 소멸되는데 있다. 강간은 결국 미셸과 범인을 매개하는 사적행위에 머물게 되며, 그럼으로써 역시 미셸과 범인 둘의 관계는 강간으로 관계를 맺는 가변적인 권력관계로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녀는 계속해서 욕망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나는 앞에서 미셸이 강간을 당하면서 흥분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나는 이런 설명이 윤리적 측면에서 논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흥분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자면 미셸이 강간을 당하면서 느낀 흥분은 성적 흥분이 아니다. 이 흥분은 기괴하게도 폭력 또는 피에 대한 갈망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번째로 당했던 강간을 회상하면서 상상 속에서 강간범의 머리를 재떨이로 내리친다. 그런데 미셸은 그저 강간범의 머리를 한 번 내리쳐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머리를 뭉개버려서 피칠갑을 만든다. 폴 버호벤이 강간당하는 미셸의 표정과 몸짓을 보는 이들의 눈앞에 클로즈 업으로 끌어 당겨놓는 것은 비로소 우리가 그녀의 폭력에 대한 갈망을 인지하면서 부터다.

미셸의 이런 폭력적 욕망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유년시절 연쇄살인사건과 얽힌 그녀의 비밀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 조지 르블랑은 27명을 살해한 잔혹한 살인범이다. 그리고 당시 10살 소녀였던 미셸은 사건 현장에서 잿더미를 뒤집어쓰고 광기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발견된다. 미셸은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미셸은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가 체포되어서 살아남아버린 마지막 희생자였을 수도 있다. 혹은 뒤틀린 영혼으로 태어나 신비한 힘으로 아버지에게 살인을 교사한 악마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였을 수 있다. 폴 버호벤은 이 비밀을 끝까지 남겨둔다. 비밀은 비밀일 뿐이다. 다만 미셸의 폭력과 피에 대한 욕망은 또 다시 (의도적으로)타인의 손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달성된다.

 미셸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폭력에 대한 내면의 욕망을 부르주아 자의식을 통해 억누르는 존재다.

미셸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폭력에 대한 내면의 욕망을 부르주아 자의식을 통해 억누르는 존재다. ⓒ 소니 픽쳐스


폴 버호벤은 켄 로치와 같이 계급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사회주의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들에서 계급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표현이 능수능란한 감독이다. 그의 할리우드 시절 대표작인 <로보캅>(1987), <토탈리콜>(1990), <스타쉽 트루퍼스>(1997)와 같은 작품들은 사실상 계급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엘르>는 중년을 훌쩍 넘긴 부르주아 여성 미셸이 강간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녀라는 존재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미셸이 50대의 부르주아 여성이 아니라 20대 혹은 30대의 노동자 계급 또는 하층민 여성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강간을 다루는 영화는 윤리적 문제로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엘르>는 어쩌면 지금 영화가 강간을 다루는 보이지 않는 윤리적 마지노선 일수 있다. 우리가 <엘르>를 여성의 신체와 강간이라는 행위를 매개로 (부르주아)계급과 동시에 또한 계급으로서 여성의 욕망에 대한 미시적 심리학으로도 볼 수도 있는 것은 그나마 계급을 사려 깊게 영화에 배치하고 폭력과 욕망을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주조하는 경지에 이른 폴 버호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엘르>에 관한 가장 중요한 어휘는 '부르주아 여성'과 '강간'이 아니라 (그 여자)'미셸'이다. 왜냐하면 미셸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비밀에 둘러싸인, 그리고 강간이라는 폭력을 통해 더 끔찍한 폭력을 욕망하는 미스터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엘르>를 스릴러로써 발견했다면 그것은 강간범의 정체가 밝혀지고 강간범을 체포하거나 처벌할 때까지 서스펜스를 발견했다기보다, 오히려 폭력을 마주할 때마다 미셸이 띄고 있는 아주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는 웃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섬뜩한 웃음 때문에 <엘르>는 강간과 여성, 그리고 계급을 다루는 윤리의 일반화를 시도하는 어떠한 접근도 비껴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해외 영화제와 비평가, 관객들에게 폴 버호벤의 <엘르>가 이미 많은 호평을 받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폴 버호벤의 <엘르>를 너무 단순화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별점과 한 줄 평으로라도 영화를 기록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한 줄 평들이 그저 포스터의 카피를 반복하고 있거나 영화를 오해한 채로 요약해 버리는 것은 영화에게도, 그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도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자들이나 평론가 영화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직업윤리와 일정부분 관계된다. 내가 접한 <엘르>에 대한 짧은 영화평 중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평들은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강간에 대한 복수극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인권재단 인사동 칼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엘르 강간 폴 버호벤 이자벨 위페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현실의 공허한 공포를 떠올린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어디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그 남자」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은솔아, 돌잔치 다시 할까?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