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엘르> 메인포스터

<엘르> 메인포스터 ⓒ 소니 픽쳐스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앵글 밖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비명 소리.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는 집 고양이. 복면을 쓰고 침입한 괴한과 그에게 폭력적인 강간을 당하는 여성. 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들이 마주하는 장면들이다. 그 동안 수 많은 영화를 봤지만 이처럼 불편한 오프닝 시퀀스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작품 내 성적 표현으로 국내 제한 상영가 논란이 있었던 영화 <님포마니악>(2014)조차 이렇게 시작되지는 않았다. 감독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이어지는 장면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집을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만약 이 작품을 통해 지금 일어난 이 일의 전모가 드러나고, 주인공인 미셸(이자벨 위페르 역)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영화 <엘르>의 감독은 관객들의 그런 궁금증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02.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이토록 거칠고 낯선 연출을 스크린에 표현한 감독에 대해 의문을 가질 법하다. 알고 보면 의외로 낯설지 않은 감독이라는 것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30대 이상의 관객들이라면 적어도 이 감독의 작품 중 하나를 직접 관람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 그는 바로 <로보캅>(1987)을 시작으로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1992), <스타쉽 트루퍼스>(1997) 등의 작품들로 1990년 대에 가장 유명했던 폴 버호벤 감독이다.

이 작품 <엘르>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처음 공개되면서 그가 언론으로부터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 작품이다. 실제로 그가 연출에 대한 욕심을 버렸던 것은 아니었으나, 10년이 넘도록 눈에 띄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현재의 상업성과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상이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에 가장 상업적인 할리우드 작품들을 만들어 냈던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엘르>의 한 장면

<엘르>의 한 장면 ⓒ 소니 픽쳐스


03.

감독이 관객들의 궁금증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과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현재의 영화 산업이 추구하는 상업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의미는 어쩌면 이번 영화 <엘르>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만큼이나 불편한 부분들 때문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성폭행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과거와 현재로부터 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 한 사건의 인과관계에 집중하기보다 그런 폭력들 속에서 발현되는 미셸의 심리에만 집중하는 감독의 집요함. 이는 그의 전작인 <원초적 본능>에서 보여준 바 있는, 캐서린 트라멜(샤론 스톤 역)의 은밀한 곳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 카메라의 앵글을 이 영화의 밖으로 가져온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그 장면에서 엿보이던 감독의 시선이 이 작품의 미셸에게도 쏟아지는 것만 같다.

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엘르>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미셸이라는 인물을 결코 단순한 피해자로 낙인하는 단순한 종류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수 많은 폭력들에 맞서 결코 무너지지 않고 나아간다. 어쩌면 그녀가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 뒤에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지인들에게 담담하게 그 일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까닭인지도 모른다. 어린 자신의 앞에서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던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며 돈을 주고 젊은 남자의 성을 사는 어머니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강요하는 동료의 남편도. 심지어는 자신을 대상으로 성적 욕구를 표출하는 회사의 직원까지. 모든 종류의 폭력 앞에서 말이다. 더 나아가 감독은 그런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엘르>의 한 장면

<엘르>의 한 장면 ⓒ 소니 픽쳐스


05.

실제로 그녀가 겪은 일들과 그녀가 행동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가지가 묘하게 짝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반대다. 목적을 위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던 직원에게 불법적인 일을 시킨다거나, 동료의 남편의 요구를 굳이 거절하지 않고 즐긴다거나, 멀쩡히 배우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집 남자에게 욕정을 가진다거나, 자신을 대상으로 성적 욕구를 드러내던 직원의 바지를 벗게 만들어 수치심을 준다거나 하는 그녀의 모든 행동들.

결국 폴 버호벤 감독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 역시 동일한 종류의 폭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표현한다. 물론 그것이 피해자로서의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을 경감시키거나 가해자들의 행위에 당위성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은 결코 아니다. 피해자로서, 그리고 가해자로서 드러나는 그녀의 이면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이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또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이 영원히 고정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폴 버호벤 감독의 작품은 극단적인 쾌락의 양면성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Paul Verhoeven's film isn't afraid to inhabit the maddening ambivalence of pleasure.)'는 미국의 평론가 Diego Semerene의 말처럼.

06.

영화 <엘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할리우드의 수 많은 여배우들이 그의 시나리오를 거절했다고 한다. 심지어 감독과 함께 <원초적 본능>을 함께 했던 히로인 샤론 스톤조차도 원안의 자극적인 이야기에 많은 부담을 느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이 자신의 성향이나 색깔, 작품에 대한 호기심의 방향을 꺾지 않는 이상, 언제쯤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을 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유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폴 버호벤 감독이 아무래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이 사이코패스라 부르던 아버지는 딸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옥 중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증오했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토해내는 미셸의 모습을 통해 감독이 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런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브런치 계정 https://brunch.co.kr/@joyjun7 에 중복게재될 예정입니다.
영화 무비 엘르 폴버호벤 이자벨위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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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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