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소니픽처스


시작은 고양이의 시선과 그 시선이 향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다. 자신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강간을 당한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 미셸은 피가 흐르는 자신을 돌보는 대신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떨어져 깨진 그릇을 먼저 치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조용히 목욕으로 흔적을 지운다.

강간을 당했다

한 여인의 강간 사건, 하지만 영화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는 출판사를 경영했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게임 회사 CEO가 된 여자. 그런 사회적 지위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덮게 했을까? 안타까움을 가지고 미셸을 따라가는데 뜻밖에도 패스트푸드점에서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자신이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붓는다. 하지만 미셸은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강간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의 가족사를 들추며 '인간 존재의 그 모호함'에 대한 질문으로 번져간다. 피해자였던 미셸은 그와는 반대로 게임 속 피해자인 여성에게 '오르가슴'의 절정을 보다 '자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웃에 사는 잘생긴 남의 남편을 훔쳐보며 '자위'를 즐기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는 '성적 파트너십'을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무조건 적대적이고, 이혼한 남편의 여자 친구에게 집적거린다. 자신의 강간 사실을 지인들에게 당당하게 밝히면서도 경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패스트푸드점의 봉변은 알고 보니 한 마을 가족과 동물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그의 아버지의 범죄와 그의 조력자로 봉인된 10살 시절 미셸의 과거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30년 만에 가석방 신청을 하자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 가는 그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렵게 일궈온 현실의 성취를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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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편들어 줄 수 없는 그녀 

'편'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우리에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사이코패스 조력자였을 지도 모르며, 이제 그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재에서 게임의 판매에 눈이 벌게져 성의 상품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성적' 태도 역시 그다지 '도덕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미셸의 '강간'을 희석화시킨다. 그녀를 '피해자'의 편에 세워 두둔하자니, 미셸이 보이는 행태들 역시 '돌 맞을 짓', 딜레마다.

<엘르>는 노장 폴 버호벤 감독의 16번째 영화다. 그의 작품이 늘 '폭력'과 '섹스'라는 화두를 피하지 않고 직진해왔듯이 <엘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그가 등장시킨 주인공은 <포스맨>(1983)이래 <원초적 본능>(1992) <블랙북>(2006) <트릭>(2012)의 그의 전작 속 주인공들처럼 쉽게 얼싸안기 쉽지 않은, 도덕적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애써 지운 채 '냉혈한'처럼 사업에 매진하며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그녀에게 벌어진 범죄.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서로 엇물리며 얽힌 사건들을 통해 폴 버호벤 감독은 부조리한 인간 세상에서 그런데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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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가족사 혹은 인간사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미셸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이정표'가 된다. 돈으로 남편을 산다고 어머니에게 퍼부었지만, 결국 그녀의 삶 역시 그녀가 그리도 '거역'해왔던 부모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무표정하게 도발해 가는 미셸, 그러나 자신을 채워왔던 그 '부조리한 관계'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간다.

과거 아버지 사건 이후 미셸은 '법'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진실에 귀 기울여 주는 대신 자신들의 편의대로 그녀를 요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건, '법의 도움'이 아니라, 어쩌면 30년 만에 '법'에 대한 복수이자, 또 다른 결자해지일 지도. 진실 대신 '이슈'를 원한 법에 가장 적절한 먹이를 공급하며.

그리고 30년 전 아버지와 그녀가 그 사건으로 내내 꽁꽁 묶여있듯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아들을 자신의 곁에 둔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젖'을 양보했던, 그래서 늘 '가정'을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선물'하며 남보다도 못한 모자 관계를 청산한다.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건. 그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미셸 일가의 잔혹한 역사는 계승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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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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