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101> 시즌 2, 포스터

<프로듀스 101> 시즌 2 포스터. 지난 17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당연하게도 시즌3 제작이 확정되었다. ⓒ Mnet


<프로듀스 101>이 지난 17일, 11화를 끝으로 성황리에 종영했다. 누군가는 욕했고, 누군가는 폐지를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그 모든 것은 인기와 화제성의 반증이었다. 대부분 시청자는 <프로듀스 101>이 폭력적이라는 데 동의했지만, 동시에 그 폭력을 즐겁게 누렸다.

그들은 프로그램 참가 자체가 연습생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옹호했다. 인간의 상품화는 이미 만연한 현상인데 왜 <프로듀스 101>만 특별하게 '마녀사냥'을 하냐고 반문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시각과 시즌 2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시즌 3 방영이 결정되었다. 지금이야 말이 많아도 어쨌든 방영하면 다들 볼 거라는 사실을, CJ E&M(Mnet)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슈퍼스타 K>를 죽인 건 악마의 편집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저조한 시청률이었다. <프로듀스 101>도 마찬가지다.

시즌 3은 분명히 방영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폐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윤리적 회색지대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스크린에 노출되는 순간, 그 노출은 해당 행위에 대한 승인으로 여겨진다. 노출되면 될수록, 우리는 폭력에 둔감해지고 더욱 쉽게 받아들인다. 그보다 수위가 낮은 폭력을 행하는 이들을 보면서 '난 저 정도는 아니지'라며 자신을 정당화할 여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발랄하고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폭력일수록 더욱더 그러하다.

폭력을 향한 직접적 고발. 이는 미디어 제작자가 아닌 개인 수용자 입장에서, 이러한 추세에 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동장치다. 나는 그 폭력이 사회에서 승인되지도, 더는 반복되지도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듀스 101>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마녀사냥'이 아닌 정당한 비판이다.

선택의 문제일까

'프로듀스101 시즌2' 보이그룹 아이오아이 개봉박두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101명의 연습생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총 53개 기획사에서 모인 101명의 남자 연습생들이 참가한 <프로듀스101 시즌2>는 대중이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멤버들을 발탁하고 콘셉트와 그룹명 등을 직접 정하는 국민 보이그룹 육성 프로그램이다. 7일 금요일 오후 11시 첫 방송.

<프로듀스 101> 시즌2는 총 53개 기획사에서 모인 101명의 남자 연습생들이 참가했다. 대중이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멤버들을 발탁하고 콘셉트와 그룹명 등을 직접 정하는 국민 보이그룹 육성 프로그램이었다. ⓒ 이정민


<프로듀스 101> 옹호자 중 다수는, 이 모든 폭력이 '연습생들의 자발적 선택'이기 때문에 '사적 계약'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안에서 어떠한 폭력이 오가는지는 계약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선택이 억압을 억압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억압은 억압을 택하게끔 하는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그 구조와 억압이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 않은지 되물어야 한다. 구조적 문제와 개인적 선택 사이의 경계는 항상 불명확하다.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억압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 탓이라면, 설사 그 선택이 개인의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선택지 자체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최저임금은, 개인이 그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할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 선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회적 규제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빈곤함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사회적 인정이다. 아무리 갑과 을 사이의 사적 계약이라 하더라도, 둘은 최저임금보다 낮은 수준의 가격에 노동력을 거래할 수 없다. 그게 법이다.

그렇게 사회는 구성원이 누려야 하는 권리의 '최저선'을 정한다. 그 선을 넘어가는 폭력성은 자발적 선택과는 상관없이 금지된다. 그 '선'을 우리는 대충 뭉뚱그려 '시민권' 내지는 '인권'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듀스 101>이 자발적 선택이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권리의 최저선을 넘기는 폭력이었는지에 대해 따져야 한다.

'인간의 상품화'는 어차피 만연한 것?

'프로듀스101 시즌2' 보이그룹 아이오아이 개봉박두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101명의 연습생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총 53개 기획사에서 모인 101명의 남자 연습생들이 참가한 <프로듀스101 시즌2>는 대중이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멤버들을 발탁하고 콘셉트와 그룹명 등을 직접 정하는 국민 보이그룹 육성 프로그램이다. 7일 금요일 오후 11시 첫 방송.

지난 4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101명의 연습생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프로듀스 101>의 폭력이 '최저선'을 넘겼다고 칭할 정도로 유별난가? 어차피 우리는 모두 자신을 상품화하여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시장에서 개인의 노동은 값이 매겨지고, 그 품질이 일률적인 금액으로 서열화된다. 노동은 금액으로 소급되고, 그 금액의 많고 적음은 개인의 노동 품질을 '보다 가치 있는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마트 점원의 노동은 의사의 노동보다 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노동 상품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자체 또한 엄중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현 체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거대담론이 아닌 이상, 서열화만을 가지고 <프로듀스 101>을 꼭 집어서 폐지하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프로듀스 101>에서는 일률적 서열화의 대상이 노동이 아닌 '존재가치'라는 데서 발생한다. <프로듀스 101>에서는 등수가 곧 그라는 존재 자체를 규정한다. <프로듀스 101> 내 서열화의 양상과 대상은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 또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명백히 다르다. 마트 점원의 노동력이 의사의 노동력보다 값싸게 거래된다고 하여, 그 점원의 인간적 존재 가치가 의사의 존재 가치보다 낮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데도.

<프로듀스 101>은 서열화의 정도가 훨씬 직접적이고 촘촘하다.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참가자를 합격, 또는 불합격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해 100명이 있다면 '상위 50등', 또는 '하위 50등' 정도의 이름표를 부여받는다. 그 50등 내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해석의 자유다. 자위와 안도의 여지가 조금은 주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프로듀스 101>은 연습생들에게 정확한 등수, 숫자를 부여한다. 합격, 불합격이면 그저 '합격자'로 행복했을 3등은 자기 위에 1, 2등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도 정확히 누군지, 특정해서 알게 되고, 개별자를 자신이 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저 '불합격'만으로도 속상했을 99등은 '합격은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에 다시 한번 공격받는다. 등수뿐인가? 투표수까지 공개된다.

 '워너원' 11명에 최종 선발된 <프로듀스 101> 시즌 2 참가자들. 이 등수 놀이에서 선택받았으니, 그들이 행복해하니 괜찮은 걸까.

'워너원' 11명에 최종 선발된 <프로듀스 101> 시즌 2 참가자들. 이 등수 놀이에서 선택받았으니, 그들이 행복해하니 괜찮은 걸까. ⓒ Mnet


둘째, 프로그램 내에서 개인들은 해당 '등수'로 호명된다. <프로듀스 101>에서는 시청자들의 선택에 따라 등수가 붙고, 연습생들은 '00등 000'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인 이름표를 배에 붙이고 생활한다. 연습생들의 모든 말의 자막 앞에도 그 등수가 따라붙으며, 피라미드식 의자 구조에 앉아 '사람 위에 사람, 사람 아래에 사람'이라는 관용어를 정확하게 재현해낸다. 트레이너들 또한 연습생들의 등수를 계속 상기시켰다. 심지어는 합숙 생활 중 등수에 따라 밥을 먹게 해 하위권은 거의 맨밥만 먹어야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처럼 노골적인 연출은, 각 개인이 등수를 자신의 핵심 정체성이자 사람들에게 보이는 방식이라고 받아들이게 한다. 이제 숫자는 단순히 '인기도 등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변모한다.

이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등수'라는 해당 요소는 점점 더 중요해진다. 만약 A가 달리기에서 반 꼴등을 했다고 하자. A에게 달리기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므로 달리기를 꼴등 한 것 자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달리기는 A라는 사람의 정체성에서 1%만 차지하며, A는 달리기 외 다른 여러 부분에서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A를 '달리기 꼴등'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반복적으로 상기시킨다. 반복 학습은 점점 A는 시선을 내면화하게끔 만들고, 점차 '꼴등'이 A에게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조금씩 A의 안에서 '달리기'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1%, 3%, 15% 37%…. 당연히, A는 점점 우울해진다.

셋째, 이런 '등수'는 이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평가한 결과다.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노래 실력', '랩 실력' 등 개인의 한 가지 특성에 기반을 둬 결과를 통보했다. 그러나 <프로듀스 101>은 개인의 노래 실력, 춤 실력, 끼, 매력, 외모, 인성, 노력 등 명확하게 범주화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평가한다. 정해진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을 저마다 정해 연습생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 기준의 모호성 때문에, 연습생들은 자신의 모든 특성을 하나의 등수로 평가받는다. 다시 말해 <프로듀스 101>의 101등은 '너 노래 못해'나 '너 춤 못 춰'가 아니라, '너는 이 101명 중에서 제일 별로야'라는 선고이다. 특정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아닌 삶 자체가 서열화되는 순간이다.

위에서 든 예시는 '달리기'에 대한 서열화와 호명이었다. 이번에는 '달리기'가 아니라 반 친구들이 A라는 사람에게 통합적으로 매긴 점수라고 생각해보자. 'A'라는 사람에게 몇 점을 주고 싶은지에 대해 설문을 돌리고, 같은 방식으로 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각각 점수를 매겼다. 그리고 그 점수로 서열을 매겼고, A는 꼴등을 했다.

타인이 보는 'A의 총체', 당연히 그 점수는 A의 정체성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달리기보다 훨씬 높다. 이제 모든 사람이 A를 '꼴등 A'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호명이 반복될수록 중요도는 올라간다. 72%, 85%, 97%…. 자신의 정체성의 90% 이상이 하나의 점수로 모인다면, 그 점수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치가 '꼴등'이 된다면, 그리고 그 선고를 매일같이 받는다면 그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존재의 서열: 시청자와 연습생

'프로듀스101 시즌2' 남자 아이오아이 탄생시킬 트레이너군단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트레이너 군단인 이석훈, 신유미, 가희, 보아, 권재승, 치타, 던밀스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총 53개 기획사에서 모인 101명의 남자 연습생들이 참가한 <프로듀스101 시즌2>는 대중이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멤버들을 발탁하고 콘셉트와 그룹명 등을 직접 정하는 국민 보이그룹 육성 프로그램이다. 7일 금요일 오후 11시 첫 방송.

지난 4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트레이너 군단인 이석훈, 신유미, 가희, 보아, 권재승, 치타, 던밀스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여기까지도 다 '평가받는' 사람들 사이의 서열화다. 존재의 서열화는 그 자체로도 폭력적인 인권 침해지만, 적어도 이 서열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존재를 평가받는' 사람과 '존재를 평가하는' 사람의 서열 사이에는 완벽한 격차가 존재한다. 평가의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게 평가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다. 평가받는 이들은 사실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평가자의 변덕에 따라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만한 절대권력과 절대 지배가 또 어디 있는가.

연출은 이를 부각하면 더 부각하지 절대 완화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내내 보아 프로듀서는 연습생들에게 '국민 프로듀서님께 인사'라는 말로 카메라를 향해 90도 인사를 시킨다. 연습생들은 프로그램 내내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열심히 했는데 등수가 나오지 않아도 서운한 내색을 내비치면 안 된다. 바로 '건방지다'는 누리꾼 폭격을 맞으니까. 이 폭격은 '점수는 네가 잘해서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널 좋아해서 주는 거야, 착각하지 마'라는 우월성의 선언이다.

그래서 연습생들은 그저 모든 등수를 달게, 감사히 받아야 한다. 열심히 하고도 등수가 폭락했는데, 슬픈 표정을 지을까 봐 바들바들 떨면서 미소를 짓는 연습생들은 이 프로그램 내에서 '평가하는 사람과 동등한 인간'일까. 아니다. '국민 프로듀서'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완장이 결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만든다. 물론 서열의 위계는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평가의 대상이 특정 능력이 아니라 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노골적 위계를 계속해서 참가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만큼은 <프로듀스 101> 고유의 폭력이다.

권리의 최저선, 그 아래

 <프로듀스 101>의 방송 장면.

<프로듀스 101> 시즌2는 시즌1과 마찬가지로 국민 프로듀서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권력만큼, 절대적으로 폭력적이며 잔인했다. ⓒ Mnet


<프로듀스 101>은 인간의 존재를 서열화하고, 이를 등수로 소급한다. 내 '존재'가 일률적으로 서열화된다는 것은 내가 내 위 서열의 사람에 비해 존재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연출을 통해 이러한 '대상화'를 참가자들이 내면화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그 서열 위에서 생각하게끔 만든다. <프로듀스 101>은 그 서열화를 정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포장한다.

'인권'의 선언은 그 누구도 존재가치에서 다른 누구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기반을 둔다. <프로듀스 101>은 그 전제를 무너뜨린다. 권리의 최저선이 어디쯤 있는지는 논란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내 존재'가 '타인의 존재'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믿음 정도는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프로듀스 101>은 그 전제를 무너뜨리고,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았다. 밑바닥에 있는 연습생에게, 최상층에 있는 팬들과 제작진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피라미드.

선호가 아닌 필요 때문에 프로그램을 봤다. 픽은 하지 않은 데다, 도저히 보기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는 불성실한 시청자였다. 하지만 마지막 옹성우씨의 소감이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매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근데 매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합니다."

옹성우씨에게 5등이란 그런 의미였던 거다. 사랑받고, 매력 있다는 인정. 떨어진 연습생들에게도 '너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어디에도 그런 위로는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프로듀스 101>은 인권침해를 '뽀송뽀송'하게 포장한 뒤, 연습생들의 상큼함과 '노오력' 신화로 치장한 프로그램이다. 이는 시청률과 인기로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이를 미디어로 방영해 비슷한 폭력이 승인될 여지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 <프로듀스 101>은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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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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