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이한빛 PD 시민 추모문화제.

지난 4월 28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이한빛 PD 시민 추모문화제. 한 누리꾼의 추모글이 눈에 들어온다. ⓒ 김윤정


지난 14일, CJ E&M이 tvN <혼술남녀> 조연출이었던 고 이한빛 PD 사망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약속했다.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유가족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지 2개월 만이었다. CJ E&M 측은 책임자 징계 조치와 회사 차원의 추모식은 물론, 방송 제작환경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제작인력의 적정 근로시간 및 휴식시간 개선, 합리적 표준 근로계약서 마련 및 권고까지 약속했다. 이한빛 PD의 죽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불합리한 제작환경과 조직 문화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CJ E&M과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 사건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의 공동 보도자료가 발표된 15일, <오마이뉴스>는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씨를 만났다. 그는 주저하던 아내 김혜영씨를 설득해 CJ E&M과의 싸움을 시작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정작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인 4월 초 간농양(간고름집)으로 쓰러져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다.

6개월의 싸움, 그리고 사과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미디어카페 후에서 고 이한빛 PD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CJ E&M 대표이사와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관련 사항을 논의하고 약속하는 공식 간담회를 진행했다.

ⓒ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미디어카페 후에서 고 이한빛 PD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CJ E&M 대표이사와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관련 사항을 논의하고 약속하는 공식 간담회를 진행했다.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미디어카페 후에서 고 이한빛 PD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CJ E&M 대표이사와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관련 사항을 논의하고 약속하는 공식 간담회를 진행했다. ⓒ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


- 14일 CJ E&M 김성수 대표 등 여러 임원을 만났다고 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실무 협의는 미리 다 마친 상태였고, 14일은 마무리를 위한 자리여서 특별하게 오간 이야기는 없었다. 어제 만남은 최종적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하는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 협상 과정에서 가장 의견이 나뉜 부분은 어떤 거였나.
"4월 18일 기자회견 이후, 사측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막내 작가나 용역 등 외부 계약직 직원들에 대한 임금을 대폭 상승시켜주겠다든가, 근로 조건을 개선하겠다든가…. 굉장히 전향적이고 구체적인 안을 먼저 들고나와서 우리는 거기에 조금씩 보태는 정도였다. 다만 대책위는 개선안에 임금 상승 금액을 명시하길 바랐지만, 사측이 업계 협의 없이 공개적으로 명시하는 건 부담스럽다고 해서 그 부분은 양보했다."

- 사측은 이한빛 PD 사후, 고인의 업무 태도나 성격 등을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은 없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명한 tvN 본부장이 직접 사과했다. 접근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제대로 진상 조사가 안 됐고, 그래서 문제 인식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고. 초반 우리에게 방어적이었던 사측 대응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 고인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발언한 선임 PD도 있지 않았나. 유가족에게 직접 사과는 했나.
"선임 PD와 <혼술남녀> 총괄 연출자였던 최규식 PD가 직접 사과하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거절했다. 국장이나 본부장,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했지 않나. 프로그램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징계위가 열리고, 인사 조처 있을 거라더라.

개인적인 부분은 그들이 사과한다고 풀어질 것도 아니고, 사과하러 왔을 때 할 이야기도 없다. 호통을 치겠나, 야단을 치겠나. 분노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한솔(이한빛 PD 동생)이도, 애들 엄마도 그냥 안 만나는 게 낫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아파한 아들의 유서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한빛 PD의 죽음을 접하고 사측에 해명을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고 이한빛 PD의 죽음을 접하고 사측에 해명을 촉구했다. ⓒ @moonbyun1


대기업과 싸움을 시작하는 고 이한빛 PD 유가족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은 '다윗과 골리앗',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말들을 떠올렸다. 대기업에 맞선 개인들이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지, 수없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용관씨 모바일 메신저 상태 메시지 역시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이었다. 그는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아들의 명예를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 사건이 알려진 뒤, 이한빛 PD가 느꼈을 고통에 공감한 많은 청년이 유가족과 뜻을 함께했다. 싸움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데 이런 여론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공개 기자회견 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분이 호응해주시고 지지해주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추모집회에 그렇게 사람들이 모일 줄 몰랐고. 지속적인 SNS나, 1인 시위 등을 통해 지난한 싸움을 준비했다. 하지만 청년들이 많이 공감해줬다. tvN은 소비자가 일반 국민이고, 젊은 청년들이 많이 보는 채널이다 보니 위기감을 많이 느낀 것 같다."

- 대선과 맞물리면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 심상정 대표가 이한빛 PD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도 개선에 힘을 모으겠다는 발언을 하며 대책위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대책위 친구들은 청와대 쪽에서 협의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본 것 같다고 추측하더라.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 민주노총, 언론노조, 서울대 총학생회 등 여러 시민단체가 함께해줬다. 종합적으로 압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여러 상황, 조건이 도와줬다."

누가 너의 죽음을 나약하다 말하랴

한빛아, 미안하구나
하마터면 너의 죽음을
나약하다 말할 뻔하였구나
이 땅에 흔해빠진 것이 과로와 막말인데
엄마의 넋을 얼리고 아빠의 간을 녹인
못난 죽음이라고 말할 뻔하였구나
그러나 너의 죽음은
벌레가 되어 벌레를 밟고 올라가야하는
수직의 벌레기둥을 박차고
파란 하늘로 날아간 나비의 죽음이었더구나
몇 계단만 참고 오르면
많은 걸 누릴 수 있다는 걸 너는 알았지만
사람을 벌레로 밟고 오를 수는 없어서
벌레로 밟히면서 벌레를 밟으면서 누릴 수는 없어서
훨훨 하늘을 향해서 몸을 던진 것이었더구나
어둡고 차가운 허공에 잠기어
번데기가 되어가던 너의 몸둥아리
엄마와 아빠, 솔이와 친구들의 눈물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네가 바라던 노란 날개가 돋았구나
한빛아, 힘껏 날개를 저어라
네가 일으킨 작은 바람에 수많은 바람이 일고
괴물 같은 벌레 기둥 와르르 무너지는 날
벌레들 나비가 되어 꽃들 위로 날아가는 날
엄마와 아빠, 솔이와 친구들과 함께 반드시 오게 하마
벌레기둥 쇠기둥이 없는 나라
조금 높게 조금 낮게
모두가 나비 되고 꽃이 되는 날 기어코 오게 하마
한빛아
하늘 날개 힘껏 저어 하늘 꽃밭으로 가려무나
훨훨훨 날개 치며 가려무나
너의 죽음을 나약하다 말할 뻔하여 너무 미안하구나

- 이한빛 PD를 중학교 때 가르쳤던 나승인 선생이 이용관씨에게 보내온 시


이용관씨는 회사를 때려치울 수도, 노조를 만들어 그 안에서 싸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수없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이한빛 PD를 중학교 때 가르쳤던 선생님이 보내준 시를 보여줬다.

"이 시 그대로였던 것 같다. 벌레가 되어 서로 밟고 밟히면서 살아야 하는데, 벌레처럼 살 수 없어 나비가 되어 날아간 거라는…. 괴롭히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제도를 바꿀 수도 없고, 그 모든 걸 그대로 두고 혼자 쏙 빠져나가는 것도 할 수 없고…."

- 한빛, 한솔 두 형제 모두 사회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들었다. 요즘처럼 내 스펙, 내 미래만 고민하기 바쁜 청년들 사이에서, 아들들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두 아들 모두 활동가가 되고 싶어 했다. 활동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정신적 육체적 재정적으로 많은 갈등을 해야 한다는 말로 아들을 설득했다. (기자 주: 현재 서울의 한 중학교 국어 교사인 이용관씨는 전교조 설립에 참여했다가 해직됐었다. 전교조 정책실장, 참교육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사실 난 아들이 진보적이고, 의식이 있으니,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되길 바랐다. 교수가 되면 사회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마음껏 던져도 잡혀가지 않으니까. 근데 한빛이는 40대까지 부모에게 의존해 살고 싶지 않다면서 드라마 PD가 되겠다고 하더라. 둘째는 형이 취직했으니 자기는 활동가로 살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아들이 남긴 과제 해결하며 살겠다

고 이한빛 PD 어머니의 발언 대통령 선거 전 마지막 촛불집회인 ‘광장의 경고, 촛불 민심을 들어라 - 23차 범국민행동의 날’ 집회가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주최로 열렸다. CJ E&M 운영 채널 tvN에서 근무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가 발언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촛불혁명으로 부패하고 불의한 박근혜를 파면,구속시키고 조기 대선이 치뤄졌으나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사회개혁을 바라는 촛불시민들의 요구는 사라지고 힜다’고 우려하며 ‘사드 배치 철회, 성과연봉제-노동개악 철회 등 촛불이 요구한 적폐 청산은 이뤄지지 않은 채 박근혜의 공범인 황교안 대행과 해당 장관들이 적폐 정책을 강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선거 전 마지막 촛불집회인 '광장의 경고, 촛불 민심을 들어라 - 23차 범국민행동의 날' 집회에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가 발언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4월 29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이한빛 PD 추모제에 참석한 한 교사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정의롭게 살아라, 책임감 있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는데, 정의롭고 책임감 있게 살려다 고통받은 이한빛 PD 이야기를 접하니 아이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정의와 상식대로 살려던 청년은 '모난 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이한빛 PD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교육 현장에 선 교사다. 아들의 죽음 이후 교사로서 달라진 게 있나.
"아들이 죽기 전에도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른으로서, 놀 시간도 없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좋은 데 취직하고 잘 살 것 같아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는데, 열심히 한다고 다 대학 가는 것도 아니고, 대학 간다고 다 취직하는 것도 아니고…. 한빛 엄마 학교에서도 최근 두 명이 자살시도를 했다더라. 청소년들도 삶에 희망이 없다는 거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두 달 쉬다가 이번 주 복귀했는데, 아이들에게 두 달 비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지난 두 달 사이 바뀐 희망의 조짐들을 이야기해줬다. 그 안에는 한빛이의 죽음에 대한 사과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회가 바뀌려고 하니 너희들도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줬다."

- 가족들로서는 CJ E&M과의 싸움이 끝난 지금부터가 진짜 힘든 시간이 될 것 같다.
"애들 엄마는 지금도 매일 통곡을 한다. 아직 한빛이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질 못한다. 한빛이가 엄마랑 이야기를 많이 하고 참 잘했다. 입사했을 때도, 상암동에 방을 얻어주려 했는데, 1~2년이라도 집에서 다녀보겠다며 집으로 들어왔다. 거창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간 뒤로, 가족과 산 시간에 2년이 채 안 되거든. 그렇게 다정하던 아들이었다. 아직도 애들 엄마는 한빛이 방에 들어가질 못한다. 앞으로 통한의 세월일 거다. 내가 먼저 쓰러졌으니, 이젠 내가 아내와 한솔이 추스르려고 한다."

- 한 청년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메시지를 던졌다. 여러 시민사회와 청년들이 이 메시지에 공감했고, CJ E&M은 이한빛 PD를 기릴 수 있는 기금 조성에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갈 계획인가.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이야기했지만, 내가 한빛이 죽음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던 건 내가 그 돈을 갖겠다는 게 아니라, CJ E&M에 그만큼 책임의 무게를 지우자는 거였다. 아들의 명예회복을 했으니, 이제는 그 죽음의 의미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 방송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센터나,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 등을 생각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한빛이의 메시지에 공감한 몇몇 국회의원들과 함께 노동법 사각지대에 있는 방송 노동자들을 위한 법안, '이한빛 법' 마련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한빛이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앞으로 한빛이가 남긴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게 내게 남은 숙제다."

 4월 28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이한빛 PD 시민 추모문화제.

지난 4월 28일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이한빛 PD 시민 추모문화제에 많은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 김윤정



이한빛 혼술남녀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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