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 CJ E&M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아래 <알쓸신잡>)에서 강릉에 위치한 오죽헌을 찾은 유시민, 황교익, 유희열은 신사임당을 오직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평가하고자 하는 안내 표지판에 깊은 탄식을 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하나, 오죽헌 팻말들은 과거 박정희 정부 시절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대표적 인물로 한정지었던 가부장적 역사관에 머물러 있었다. 사임당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몇몇 소설, 드라마(SBS <사임당, 빛의 일기> 등에서 종종 있었지만 오죽헌은 사임당을 여전히 조선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기억하고자 한다.

<알쓸신잡>을 어떤 프로그램으로 정의하면 좋을까. tvN 이적 이후 <꽃보다> 시리즈, <삼시세끼> 시리즈, <윤식당> <신서유기> 시리즈들을 연이어 히트시킨 나영석PD가 총괄 기획한 <알쓸신잡>의 정체성은 예능이다. 여러 분야에 박학다식한 지식인들이 국내를 여행하는 도중 수다를 떨며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알쓸신잡>이 보여주는 전부다. 그런데 출연진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의 범위가 다양하면서도 제법 유용하게 다가오는 지식들이 더러 있기 때문에 교양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알쓸신잡>은 한 회에 많은 이야기가 오가야 하는 터라 하나의 주제만 파고들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이야기가 조금 진전되려고 하면, 끊기고 다른 대화 소재로 넘어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알쓸신잡>은 기존의 교양 프로그램들처럼 특정 주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성격의 방송도 아니요, 그렇다고 시청자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니다. 시청자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있지만, <알쓸신잡>의 출연진들은 이야깃거리를 던질 뿐,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에 대한 가치판단은 온전히 시청자들의 몫이다.

강릉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유시민은 비평 문화가 활발한 독일을 빗대어, 한국에는 비평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아쉬움을 지적한다.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문학(혹은 문화) 비평은 일명 '주례사 비평'에 가깝다. 작품에 대한 영혼없는 상찬만 난무할 뿐, 작품이 가진 장단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비평을 찾기가 갈수록 어렵다. 이는 문단 쪽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빈번하게 제기 되는 문제다. 여하튼 유시민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의 <광야>를 격렬하게 비판했던 독일의 저명한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례를 거론하며, 권위 있는 작가의 작품도 비평할 수 있는 문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일방적 정보 제시 대신 '생각거리'를 안겨주다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 CJ E&M


이를 두고 김영하와 황교익은 일방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 시청자 혹은 대중에게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방송 혹은 비평적 풍토가 있어야 함을 제기한다. 김영하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은 가족 혹은 지인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한다. 요즘 화제가 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도무지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 프랑스의 문화라고 한다. 물론, 모든 프랑스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쉴틈 없이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에 가까운 정감있는 대화를 나누는 <알쓸신잡> 출연진들의 모습은 흡사 유럽 지식인들의 일상을 보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보기 힘든 풍경을 보여주는 <알쓸신잡>이 쏠쏠하게 인기를 끄는 것도 나영석PD의 tvN 이적 이후 예능들이 늘 그러하듯이 대중들의 로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알쓸신잡> 출연진들이 오가는 격조 있는 대화가 재수없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분야를 알고자 노력했던 그들은 대화 중 자신이 모르는 주제의 이야기가 나와도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 하나하나씩 알아가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 준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려고 하기보단,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짤막한 코멘트 형식으로 제기한다. 유시민은 말한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책이 존재할 수 있으며, 진짜 책읽기는 책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는 과정이라고. 이를 통해 <알쓸신잡>의 성격을 굳이 규정하려 들자면, <알쓸신잡>에서 흘러 나오는 이야기와 지식들은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출연진들의 각자 가진 생각과 삶의 태도에 기반한 일종의 해석에 가깝다.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지난 16일 방영한 tvN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방송화면 캡쳐 ⓒ CJ E&M


앞서 언급한 오죽헌의 팻말들도 어떤 이에게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다가올 수 있다. 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이자 예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가르쳐졌다. 지금도 사임당을 과거 지배층들이 주입시킨 현모양처의 테두리에 갇혀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시민, 황교익, 유희열은 사임당을 오직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간주하려드는 오죽헌의 팻말에 불편함을 느꼈고, 그 방송을 본 필자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유시민은 사임당에 대한 가부장적 해석에 강한 문제의식을 제기 했고,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신사임당에 이어 강릉과 인연이 있는 조선조 대표 여류 인사 허난설헌의 생가를 돌아본 유시민, 황교익, 유희열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여성에게 유독 억압적인 시대적 분위기에 의해 희생당한 지난날 여인들의 삶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화가였지만 후대 사람들에게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기억되는 신사임당, 신사임당처럼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뽐냈음에도 시대의 벽에 갇혀 안타깝게 요절한 허난설헌의 삶. 이들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재능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아온 여성들의 이야기가 페미니즘이 다시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비록 이 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없지만, 적어도 신사임당을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간주하려 드는 남성중심적 역사관에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알쓸신잡>은 분명 유용하고도 쓸모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는 의미있는 프로그램이다.

알쓸신잡 유시민 사임당 허난설헌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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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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