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의 데뷔는 언제나 반짝였다. 2014년 첫 영화 <봄>으로 밀라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신인이 되더니, 2017년 첫 드라마 <터널>로는 OCN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모든 성과가 '이유영 덕분'은 아니겠지만, '배우 이유영의 힘'은 분명히 있었다.

서늘한 듯, 차분한 자신만의 독보적인 이미지와 독특한 보이스로 단숨에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배우 이유영을 만났다. 하얗다 못해 맑은 피부와 연한 갈색의 눈동자. 첫인상은 차갑고 냉랭해 보이는, 영락없는 <터널>의 신재이 교수였지만, 조금 이야기를 나누자 금세 그의 순수함과 맑음이 전해졌다.

무모해서 용감한 신재이, 엉뚱해서 용감한 이유영

 OCN토일드라마 <터널>에서 신재이 역의 배우 이유영이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유영의 첫 인상은 차갑고 냉랭해 보이는, 영락없는 <터널>의 신재이 교수였다.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나누자 금세 그의 순수함과 맑음이 전해졌다. ⓒ 이정민


신재이 교수는 여성 연쇄살인범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로, 어둡고 차가운 인물이다. 초반 소름 돋을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를 풍겨 혹시 그가 살인범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후반부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상할 정도로 폐쇄적이던 신 교수의 성격이 외로움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특별한 에피소드나 반전은 없었다. 대신 느리고 조용하게, 무디고 '이상한 여자'였던 신 교수의 성격을 유지한 채, 아픔과 상처를 시청자에게 전달했다. 신인답지 않은 놀라운 연기였지만, 그는 모든 게 작가와 감독의 연출 덕분이라며 웃었다.

"저도 초반에는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싶었어요. 대본에는 살인범으로 보일 만큼 무섭고 이상한 애라고 쓰여 있었고, 감독님도 더 무서웠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평소 제게는 그런 모습이 없거든요. 카리스마도 없고. 감독님도 불안해하셨는데, 연출을 잘 해주신 덕분에 1~2회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나왔더라고요. 하지만 그땐 사람들에게 너무 비호감으로 보이는 건 아닐지 걱정됐어요. 흔들린 적도 많았지만, 감독님이 '네가 연호라는 게 밝혀진 다음의 변화가 더 두드러지려면 지금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하셨어요. 더 차갑고 무섭게 가야 한다고요. 감독님을 믿고 마음을 다잡았죠."

 <터널>의 한 장면.

<터널>의 한 장면. ⓒ CJ E&M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일까? 신재이는 때로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다. 스스로 살인범의 미끼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터널>에 등장한 두 명의 연쇄살인범 정호영(허성태 분)과 목진우(김민상 분)에게 모두 목을 졸렸다. 고초도 이런 고초가 없다. 극도의 공포심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이런 연기를 경험한 많은 배우들은 트라우마를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지난 5월 진행된 <터널> 기자간담회에서 "필요한 장면만 끊어 촬영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부담은 없었다"며 담담하게 말한 바 있다.

기자간담회 당시는 정호영에게 졸리고, 목진우에게는 졸리기 전이었다. 정호영과는 아무렇지 않았다 쳐도, 목진우와의 장면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방송 뒤 시청자들 사이에서 신 교수 핏줄, CG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말이다.

"처음 목 졸린 장면 보니 더 실감 나게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세 번 나눠서 찍었는데, 모니터 보면서 더 숨을 참았죠. 근데 김민상 선배님은 힘을 하나도 안 주셨어요. 제가 혼자 숨참은 거예요. (웃음) 현장에서도 컷 소리 날 때마다 스태프들이 선배님한테 살살하라고 뭐라 하셔서, 선배님이 굉장히 억울해하셨어요.

하지만 숨 참으면서 온몸에 힘주고 촬영하니까, 중간중간 힘을 놓으면 순간적으로 과호흡이 되는 거예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이게 반복되니까 순간 몸에 마비 증세가 왔어요. 온몸이 저리고 입이 오그라들고. 그때는 좀 무서웠죠. 욕심이 생겨서 후반부에는 제가 좀 과했던 것 같아요. (웃음)"

대학 가려고 시작한 연기, 재능을 찾다

 OCN토일드라마 <터널>에서 신재이 역의 배우 이유영이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이유영 ⓒ 이정민


목숨을 건 신재이만큼은 아니라도, 이유영도 만만찮게 무모하고 엉뚱한 캐릭터다 싶다. 옆에 앉아있던 소속사 풍경엔터테인먼트 송종선 대표는 "<터널> 감독님이 머리 단발로 자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다음날 바로 자르고 회사에 통보하더라. 샴푸 광고 계약이라도 진행 중이었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이유영의 엉뚱 면모를 전했다. 심지어 다른 매체 인터뷰에는 미용실도 들르지 않고 혼자 비비크림만 바르고 가더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놀라 사진 촬영이 없는 인터뷰였냐고 물으니 "어떻게 해도 안 예뻐서 괜찮다"며 싱긋 웃었다. 자신을 예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에게, 배우의 꿈은 어떻게 꾸기 시작했는지 물었다.

"어릴 때 꿈이 없었어요. 공부도 잘 못 했고요. 고등학교 졸업 후 미용실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누구는 대학 갔다더라, 누구는 어디 갔다더라…. 남의 집 자식들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다 갑자기 대학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나도 갈 수 있어! 이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공부 말고 좋은 대학 갈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연기를 해보자 했죠."

거창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어릴 때부터 간직한 꿈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너무 밋밋한 대답이라 웃음이 터졌다. 스스로 끼가 있다는 생각 정도는 했을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끼도 없었고 어떻게 배우가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면서 중학교 시절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100만 원 사기만 당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100만 원에 이쪽(연예계) 일은 어렵구나, 사기꾼이 많구나, 이 길은 내 길은 아니구나만 깨달았다고. 한 번 덴 후라 지금 소속사와 계약할 때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겠다고 물으니 "지금도 걱정 많이 하신다"며 웃었다. 이렇게 흐린 이유로 배우의 길을 택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들어선 길에서 재능을 찾고, 첫 작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는 게 놀라웠다.

"처음엔 무턱대고 연기학원을 갔어요. 근데 생각과 많이 달랐죠. 연기라는 게 아는 것도 많아야 하고, 발음도 중요하고, 마음가짐도 준비돼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전부 부족했죠. 나는 열심히 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 헛살았구나 싶었죠. 그래서 지금까지 못했던 걸 채워가기 시작했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발성 연습, 신체 훈련, 독서…. 연기에 도움 될 만한 건 뭐든지 했어요."

'어쩌다 보니' 된 배우, 때론 혼란스럽지만...

 OCN토일드라마 <터널>에서 신재이 역의 배우 이유영이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쩌다 들어선 배우의 길. 하지만 그 길에서 이유영은 반짝였다. 수줍고 부끄러움 많던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 발견하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 이정민


어쩌다 보니 시작한 연기. 어쩌다 보니 맡게 된 작품들. 이유영은 지금까지 의도한 대로 온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기를 하며 매일이 새롭고,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게 됐단다. 인생이 따분했던 그는, 연기를 통해 새로운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 힘든 줄도, 어려운 줄도 모르고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학창시절 장기자랑 무대에 서 본 적도 없던 수줍던 소녀 이유영이, 카메라 앞에서 변신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배우가 됐다.

물론 두려움도 있다.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 여러 캐릭터를 흡수하다 보니, 그게 진짜 이유영인지, 그저 캐릭터인지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배역을 맡을 때마다 '저는 신재이 같은 사람이에요. 저는 신재이를 잘 표현할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어필하잖아요. 언제나 남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저를 바꾸어야 하죠. 가끔 그게 저도 몰랐던 저인지, 제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어쩔 땐 제가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기도 해요. 이렇게 약해지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불안한 만큼 중심을 잘 잡으려고요.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명확한 나를 찾을 수 있도록이요. 어쩌면 연기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어요."

이유영에게 배우의 길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인 셈. 그의 연기에서 진지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했다. 그는 연기를 통해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다. 자신에게 뜨겁게 열광하진 않더라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배우'라는 카테고리 안에 언제나 담겨있었으면 한다고. 이제 데뷔 3년 차. 그는 "이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배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별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재밌고, 욕심이 커져요. 살면서 상 욕심 있다는 생각도 잘 안 해봤는데, 첫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고 나니 여우주연상도 받고 싶어지더라고요. 정말 저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나 봐요. 제게 신재이 같은 모습이 있는 줄도 <터널>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니까요? (웃음) 전 제가 뭘 할 수 있고, 뭘 못하는 사람인지 아직 다 몰라요. 최대한 많은 역할을 경험하다 보면 제 끝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OCN토일드라마 <터널>에서 신재이 역의 배우 이유영이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유영에게 배우의 길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인 셈. 그의 연기에서 진지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했다. ⓒ 이정민



터널 이유영 신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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