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아픈 인물, 그 감정의 잔재 "예전에 <고스트> 공연을 할 때는 끝나고 분장실에 앉아서 한 시간은 있다가 나온 것 같아요. <원스> 때도 그랬고요. 그 마음의 파도가 잔잔해 진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 이후로 제가 좀 성장한 것 같아요. 배역에 너무 깊게 빠져 있는 건 배우한테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무대에서는 최대한 스스로 아프게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빠져나오는 편이예요." ⓒ 씨에이치수박


스물아홉 아니 스물일곱이 된 강원도 출신 나영은 서울에 산다. 무슨 사연으로 서울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벌써 서울살이만 5년째이다. 보증금 500에 월 30만 원짜리 작은 방을 여섯 번째 새 삶터로 정한다. 작가의 꿈을 놓지 못한, 공부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 이 청춘. 야간대학은 다니다가 그만뒀다. 그나마 책과 가까이 일하고 싶어서 제일서점에 취직하지만 여덟 번째인지 아홉 번째인지 모를 이 직장은 성희롱과 부당노동행위가 일상화된 끔찍한 곳이다.

"오늘 같은 날엔, 꼭 잠긴 내 방 앞에 우리 엄마 물김치 실어서 보낸 우체국 택배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 스물아홉, 스물일곱 내 나이만큼 헷갈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 왜 이렇게 힘드니." - 뮤지컬 <빨래> No.14 '한 걸음 두 걸음' 중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린 채 혼자 집에 들어가면서,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고 울먹거리는 나영. 서울은 사람을 품는 대신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각박하고 팍팍한 도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국으로 온 솔롱고, 장애를 가진 딸을 홀로 돌보며 폐지를 줍는 주인 할매, 서점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나 사장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김지숙…. 뮤지컬 <빨래> 속의 인물은 이처럼 하나같이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들이다. 나영의 눈물은 나영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지금 서울에서 아등바등하며 사는 우리네 모두의 눈물이다. 그 아픈 사람들이 서로의 얼룩을 어루만지며, 관객의 마음을 위로한다.

대극장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뮤지컬 배우 박지연의 첫 소극장이 바로 이 <빨래>였다. 제19차 프로덕션에 나영 역으로 합류한 박지연. 지난 3월 9일 박지연의 나영이 처음으로 눈물 흘린 이후,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빨래>는 연말까지 계속해서 달려가겠지만, 차기작 <아리랑> 합류 때문에 박지연은 오는 7월 14일을 마지막으로 <빨래>에서 하차한다. 지난 5월 18일 늦은 오후, 공연 중반부를 넘어 터닝포인트에 다다른 박지연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박지연, <빨래>를 만나다

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빨래>를 다시 본다는 것 "제가 참여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빨래>를 보셨다는 분들이 계세요. 예전에 이미 봤으니까 요즘은 안 보신 분들. 그런 분들이 극장을 다시 찾아 주신다니 기분이 좋아요. '그때랑 다르네? 새롭네, 재밌네?' 해주시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빨래>가 잘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기분이 들어서 더 행복해요. 특히 등장인물들이 다 살아 있어서 공연 자체가 좋다고 얘기해 주실 때가 제일 행복해요." ⓒ 씨에이치수박


그 시기에 올라오는 공연 중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최고'라고 느껴지는 작품만 골라왔다는 박지연. 그는 자신이 거쳐온 모든 필모그래피 하나하나를 사랑했고, 그 무대들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대극장과 소극장의 구분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빨래>를 고른 것도 굳이 대학로라서, 소극장이라서가 아니었다. <빨래>였기 때문에, <빨래>의 이야기가 지금 관객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만드는 사람들의 신념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추민주 연출께서 <빨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흔들리지 않고 존재하거든요. 그렇게 든든한 기둥이 하나 있으면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창작진이나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있어요.

상업적인 면을 떠나서, 10년 이상 롱런하면서 <빨래>라는 공연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나 노력이 있었죠. 그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잘 유지된 느낌이 들어요. 선배들이 빨래에 오면 '친정에 온 것 같아 좋았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따뜻함이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느낌? 물론 음악의 힘도 있고요."

<빨래>는 그 자체가 역사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수많은 배우의 등용문이었고, 동시에 <빨래>를 거쳐 간 뒤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는 배우가 다시 돌아오는 고향이기도 했다. 작품 자체의 상징성도 크고,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으며 여러 '전설'적인 나영들도 많았다.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등으로 주목받던 배우 박지연의 첫 소극장 도전. 그에게 쏟아진 기대, 요구되는 눈높이도 꽤 높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영을 맡는다는 건, 분명 부담이 클 것 같았다.

"사실 좀 부담스러운 건 있었어요. 나영이라는 역할은 신인들이 많이 했었고…. 물론 저는 아직 제가 신인이라고, 꿈나무라고 생각하는데! (웃음) '혹시 어떤 기대감 같은 걸 채우지 못하면 어떡하지'하는 불안이 조금 있었죠. 또, 10년 이상 같이 이끌어 온 사람들 반, 새로운 사람들 반의 구성이어서 '이게 더 새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쓸데없는 기우였어요! 오히려 <맘마미아!>처럼, <레미제라블> 때처럼 신과 구가 섞였을 때 어떤 새로움이 더 나올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뿌리는 유지하면서 새로운 어떤 것을 더할 수 있었던 그런 작업이었어요."

나영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에포닌-마리우스에서 나영-솔롱고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에포닌과 마리우스로 연을 맺었던 박지연 배우와 조상웅 배우가 다시 만났다. "그때보다 지금의 호흡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둘 다 경험을 몇 겹씩 쌓은 후에 만난 거라 서로 배려도 더 많이 하게 됐고, 워낙 편하기도 하고요. 상웅 오빠 개그에는 저만 웃어요. (웃음) 그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다는 거겠죠?" ⓒ 씨에이치수박


<빨래>는 분명 좋은 작품이지만, 그만큼 배우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배우가 표현해야 하는 인물들은 모두 밝게 웃으면서도 그 마음에 큰 흉터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특히나 나영이 감내해야 하는 감정의 파고는 절대 만만치 않다. 나영은 자신 앞에 도래한 현실을 흔들리지 않고 돌파하는 영웅적 인물이 아니다. 꿋꿋하게 의지를 다지면서도, 사무치는 외로움과 서러움에 몸부림치는 캐릭터이다. 가난이라는 벽 앞에서, 그녀의 안과 밖은 너덜너덜해진다.

"나영은 정말 외로운 여자예요. 가족과도 떨어져 있고, 연애도 하지 못하는 20대 여성의 외로움도 크죠. <빨래>라는 극이 밝은 넘버로 시작하지만, 결국 다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얘기잖아요. 그래서 외로운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대한 사람들 앞에서는 밝게 행동하죠. 할머니를 만났을 때 일부러 과장해서 인사하고, 서점 안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웃어야 하는 상황도 공감이 많이 됐어요. 극 중에서 빵 역할에게, 성적으로 희롱을 당하는 신이 잠깐 나오는데,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울컥하더라고요. 정말 외로운 사람들은 평소에 티를 내지 않아요. 그러다가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이 더 극적으로 몰려오죠. 그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어요.

연출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신이 진행될 때마다 그 장면에서 내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를 생각해라'라고. 그 부분을 공감하는 게 사실 힘들었어요. 저는 어려움 없이 정말 평범한 집에서 자랐거든요. EBS <공감>이라든가 여러 사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어요. 비정규직, IMF, 가족의 이야기 등…. <빨래> 준비하면서 드라마 <안단테> 촬영을 같이했는데, 쉬는 시간에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끄고 집에 가서 다시 보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 연출의 말씀이 되게 충격이었거든요. 누군가에겐 추상적인 말이겠지만, 내 지갑에 지금 8500원이 있다는 게, 어떤 사람들한테는 생존이 달린 일일 수도 있는 중요한 이야기잖아요.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아홉 번째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전전하고, 집값 비싼 서울에 사는 나영이라는 여성의 이야기. 그녀의 지갑엔 과연 얼마가 들어 있을까.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박지연이 지닌 얼룩 "제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갖는 편견이 있어요. 사실 선을 긋는 것부터가 불행의 시작이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선을 더 긋게 되더라고요. '나는 여기까지야', '저 사람은 딱 여기까지 일 것 같아'라고…. 이렇게 내가 남을 대하는 선들을 다 없애고 싶다는 점에서 얼룩이라고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것 같아요. 지나온 나에 대해서 없애고 싶은 얼룩이 있다면, 글쎄요. 다 소중한 기억이니까. 전 소중하니까요. (웃음)" ⓒ 씨에이치수박


그렇게 티 내지 않고 꾹꾹 눌러오던 나영은 극 중에서 송곳처럼 튀어 오른다. 오랫동안 제일서점에서 일해 온 김지숙. 제일서점 사장 '빵'은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야욕을 위해 회삿돈을 함부로 굴리며 예전부터 일해온 거래처와의 신뢰를 깎아 먹는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김지숙은 이에 반대하며 '바른말'을 하다가 사장 한마디에 일자리를 잃는다. 손찌검까지 하려 하는 빵을 가로막으며 "부당해고"라고 나영은 소리친다. 하지만 일개 직원이 아무리 원칙을 외쳐봤자, 법은 멀리 있고 폭력은 바로 앞에 있다. 오히려 보복성 부당전보 조치를 당하는 나영에게, 다른 여직원은 "그러게 좀 참지, 왜 그랬어요"라고 툭 던진다. 그 말이 방아쇠가 되어 나영은 터져버린다. "참는 게 지겹지도 않니!"

"연출이 원하시는 게 딱 그거였어요. '소리쳐!' 그래서 그 디렉션에 맞게, 제가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고민했어요. 계속 참아야 해요, 처음부터. 이삿짐 아저씨가 뭐라고 하고, 주인 할머니가 눈치 주고, 서점에서 어떤 얘기를 듣든, 나영은 계속 참아요. 그러다가 지숙 언니의 부당해고 장면에서 처음으로 터지는 거거든요.

서울에서 여자 혼자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왜인지도 모르게 서러운 상황도 많고…. 저라도 극 중 언니들이랑 같이 소주를 자주 마셨을 것 같아요. 제일 싼 안주 하나 시켜 놓고. 그렇게 술 먹고 다음 날 해장국 해 줄 엄마도 없잖아요. 출근 직전에 일어나서 대충 씻고 나가야 하는 그건 또 얼마나 힘들겠어요. 저도 사회생활을 안 해 본 건 아니니까…."

<빨래>의 현실, <빨래> 주변의 현실

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박지연이 지우고 싶은 얼룩 "사람은 한 마디로 달라지잖아요. 어떤 한 마디나, 한 경험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왜 그때 내가 그 친구에게 그런 역할을 해 주지 못했지' 이런 생각들? 제가 어떻게든 그 친구에게 더 좋은 씨앗을 뿌렸더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무관심하고, 상처를 줬던 저의 그런 모습들을 없애고 싶다면 없애고 싶어요.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까 앞으로 반성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 ⓒ 씨에이치수박


쌀쌀한 가을 날씨 탓에 고향의 어머니와 안부를 묻던 나영에게서 <빨래>의 이야기는 시작하고, 화사하게 개나리가 핀 봄에 <빨래>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정감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사실 잘 살펴보면 그다지 해피엔딩은 아니다. 솔롱고와 함께 불법체류자로 피해 다니던 마이클은 강제 추방당했다. 주인할매의 인천 사는 아들 내외가 갑자기 들어오면서, 나영과 희정 엄마는 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러 떠난다. 나영은 솔롱고와 함께 살기로 하고 새 방을 구하며 알콩달콩 서로를 보듬지만, 여전히 파주에 있는 도서 창고로 전보된 채 퇴직금이라도 받기 위해 버티고 있다. 서로를 부둥켜 안아주던 따뜻한 사람이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차가운 현실은 그대로이다. 참는 게 지겨워서 터져버렸지만, 나영의 폭발은 그저 단발로 끝나버린 것만 같다.

"저는 <빨래>가 주는 게, 현실을 깨부수는 그런 시원한 카타르시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신 '사람이 있어야 한다'가 빨래의 주제라고 생각해요. 관객 분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제 생각에 <빨래>는 '사람이 나를 살게 하는 거다'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아요. 누가 시원하게 때려치우고 직장을 나오거나 하진 않잖아요. 대신 <빨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어떻게 보면 공장장도 외로운 사람일 수 있어요. 사장의 밑에 있는 처지니까. '빵'이라는 사장 자체도 솔직히 저는 안쓰러워요. 마지막 노래 가사를 들어 보면, '내가 만날 사람도 함께 늘어갑니다'라고 하잖아요. 이사를 하며 우리는 사람을 만났고, 연합했고, 사랑도 나눴고….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라는 걸 아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그게 <빨래>의 더 중심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요."

대학로 창작 뮤지컬의 고전이자 교범처럼 된 <빨래>. 추민주 연출과 민찬홍 작곡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이었던 <빨래>는 지난 2005년 초연 이후 12년째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제는 다소 지겨울 법도 하지만 꾸준히 관객이 들어선다. 한 번 공연된 이후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작품이 허다한 공연계에서, 이처럼 한 작품이 계속해서 공연되고 있다는 건 축복이다. 동시에 이 공연을 둘러싼 환경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행이기도 하다. 공연을 여는 넘버 '서울살이 몇 핸가요?'의 가사 속 최저임금의 액수가 바뀌고, 2014년 이후로 노란 리본이 등장한다는 걸 제외하면, 서사의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빨래>가 찌르고 있는 우리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빨래>의 이야기를 '아, 옛날엔 저렇게 아프고 힘들었지'라며 과거의 노래로 규정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왔으면 좋겠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점이 제일 속상해요. 어느 날에는 '그냥 옛날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하는 그런 공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런데 또 그런 날이 오게 되면, 그때의 관객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겠죠? 그럼 또 <빨래>는 <빨래>가 필요한 곳으로, 가주면 좋을 것 같아요. <빨래>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빨래>의 이야기가 필요한 그곳으로, 갈 수 있겠죠?"

다가온 이별의 시간, 재회의 그때를 기다리며

뮤지컬 <빨래>의 '나영', 박지연 뮤지컬 <빨래>의 제19차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박지연의 공연 이미지. 박지연 배우는 이번 <빨래>에서 주인공 '나영' 역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월까지 참여 후 다른 공연을 위해 하차한다.

▲ 다른 사람에게 묻은 얼룩 배우와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며 이야기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묻은 얼룩보다, 때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묻힌 얼룩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묻힌 얼룩을 깨끗이 빨아주고 싶을 때, 나는 그와 이 작품을 함께 보고 싶다. 뮤지컬 <빨래>는 관객의 마음에 묻은 얼룩을 빨아서 지워준다. 나도, 배우 박지연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다. ⓒ 씨에이치수박


그때가 언제 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배우의 말처럼, 그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건 지금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꺾일지언정, 나영은 여전히 그 작은 꿈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얼싸안으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배우 박지연에게도 나영과 같은 꿈이 있을까.

"저는 사실 꿈이 많아요. 어렸을 때 제 꿈도 직업 배우는 아니었어요. 항상 막연히 좋아하는 거에 따라서 그때그때 바뀌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저는 항상 좋아하는 것'만' 했어요. 학창 시절에도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해서 과학은 진짜 잘했어요. (웃음) 노래도 지금 제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고,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꿈을 이룬 것 같아요.

그리고 나영이처럼 글을 쓰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서, 지금은 제 일기장이지만, 나중에는 묶어서 뭔가 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이번에 드라마 촬영을 할 때 제가 만든 노래를 장면 안에서 부를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평소에 노래도 만드는 것도 하고 있거든요. 별거 아닌 노래긴 하지만, 이런 작은 꿈들이 있고 그 꿈들을 이룰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을 붙잡고 있어요."


<빨래> 속에는 서울살이에 지친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정도에는 나를 대입해볼 수 있다. 감정적으로 동조된다. 동시에 그들 모두가 그 작은 기회들을 붙잡고자 한다. <빨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각자 다른 이유와 사정으로 지쳐있는 우리를 위로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한 번쯤 찾아가 다시 되새기고 싶은 작품. 그리고 그렇게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며 새 힘을 주는 작품. <어린 왕자>가 누가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볼 때마다 스스로 의미가 달라지는 작품이듯이.

"초등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양하게 오시더라고요. 30대든 아니면 가족이든,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빨래>를 보러 오시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요. 자녀들은 부모님의 삶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고, 부모님도 자녀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또 볼 수도 있고요. 친구들끼리 와도 서로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고, 직장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시간이 흐른 후의 '나'를 위로하고 싶으신 분들, 그런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약속된 인터뷰 시간도, 뮤지컬 <빨래>에서 배우 박지연을 만날 시간도…. 배우 박지연은 <빨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났다가 흩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서울살이처럼, 이 배우의 앞길에 다시 한번 나영과의 교차점이 생길지. <금강> 때 인터뷰 이후로 약 반년 만에 다시 만난 박지연.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와 그의 교차점은 또 생길 것인가.

"나영이는, 제가 마지막이라고 얘기는 안 할 거고요. (웃음) <빨래>라는 작품을 만나서 정말 너무 기뻐요. 친정처럼 자주 오고 싶고, 언제든지 오고 싶고요. 나영이가 만날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처럼, 박지연도 새로운 배우들을 만났다는 게 너무 기쁘고요. 작품을 하는 게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보니 아직 많은 인물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 회 한 회가 너무 아쉬워요.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사람 만나는 게 재밌고 기쁜 일이구나'라는 걸 <빨래>에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나 너 우리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나요. 그대 눈물, 그대 웃음이 담긴 사연 새겨질 방 찾아 떠돈 시간 얼마나 되나요. 그대와 나 여기 살아온 시간 만큼, 살아갈 시간들 그대 잃어버린 꿈, 그대 두고온 꿈, 다시 꾸어요. 다시 꾸어요." - 뮤지컬 <빨래> No.18 '서울살이 몇 핸가요? Reprise' 중에서

뮤지컬 <빨래> 포스터 뮤지컬 <빨래> 19차 프로덕션 포스터. 오랫동안 사랑 받은 작품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처럼, 뮤지컬 <빨래>는 항상 대학로에서 관객을 위로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뮤지컬 <빨래> 포스터 뮤지컬 <빨래> 19차 프로덕션 포스터. 오랫동안 사랑 받은 작품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처럼, 뮤지컬 <빨래>는 항상 대학로에서 관객을 위로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씨에이치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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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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