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이 나라 지난 십년 세월이 꼭 그랬다. 강은 썩어가고 경제는 말라붙고 예술인은 무얼 만들까 눈치를 봤다. 자기검열이 내면화된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분방함을 회복하기까진 또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하면 절로 아득해진다.

어느 해보다 따스한 5월이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나라 곳곳에서 훈풍이 불었다. 모든 면에서 순조로운 건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웃으며 정치뉴스를 보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소통하는 정권과 참여하는 국민, 지난 십 년 동안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 아니었던가. 정치뉴스를 보느라 극장으로 향한 관객이 얼마쯤 줄었다 해도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 5월엔 저마다 선명한 색채를 가진 영화들이 한 판 격돌을 벌였다. 직전 두 달과 마찬가지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우세를 점했고 한국영화는 <보안관> <노무현입니다> 등 단 몇 편 만이 체면치레했다. <임금님의 사건수첩>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특별시민> <석조저택 살인사건> 등 한국영화 여럿이 손익분기점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하며 실패의 쓴잔을 집어들었다.

그동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보스 베이비> <겟 아웃>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등 할리우드 발 영화들이 박스오피스를 집어삼켰다.

누리달엔 무게감 있는 이름값을 자랑하는 감독의 작품이 여럿 개봉한다. 2013년 <설국열차> 이후 4년 만에 복귀하는 봉준호의 <옥자>를 위시해 사극 스페셜리스트 이준익과 기타노 다케시, 폴 버호벤의 작품이 관심을 모은다. 아래에 누리달 기대작 5편을 가려뽑아 소개한다.

[하나] <8인의 수상한 신사들>

ⓒ 영화사 진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시작해 최고의 탤런트로, 다시 영화감독과 작가, 시인으로 입지를 공고히 한 기타노 다케시의 신작이다.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소나티네> <하나비> <기쿠지로의 여름> <자토이치>는 그가 이야기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며 직접 극중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재다능한 작가임을 입증했다.

위트와 카리스마, 진지함과 열의를 모두 지닌 기타노 다케시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바로 세상과 예술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다. 70대에 접어든 오늘까지 식지 않은 그 관심이 신작 <8인의 수상한 신사들>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으니 영화팬은 주의를 집중할 일이다.

무기력하고 희망 없는 일본 사회 가운데 제 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전성기 지난 야쿠자를 자주 연기해온 그가 다시금 가장 자신 있는 옷을 몸에 걸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이스피싱 전화 한 통에 속아넘어갈 뻔한 노년의 야쿠자가 옛 동료들을 모아 사기범에 역습을 펼친다는 이야기는 기타노 다케시의 반쪽인 코미디의 기운도 솔솔 풍긴다. 후지 타츠야, 시나가와 토오루, 나카오 아키라 등 얼굴이 알려진 배우도 여럿 출연해 보는 맛을 더한다.

6월 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회고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8일 개봉.

[둘] <엘르>

엘르 포스터

▲ 엘르 포스터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여성 원톱영화, 그것도 중년 여배우의 연기력이 한껏 발휘되는 영화를 찾기 어려운 요즘, 귀한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15일 개봉한 <엘르>는 괴한의 습격을 받은 중년여성이 직접 그 괴한에게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로보캅> <토탈 리콜> <쇼걸> 등 1980~1990년대 명작을 여럿 연출한 폴 버호벤이다.

당초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를 시도했으나 니콜 키드먼, 다이안 레인, 줄리안 무어, 케이트 블란쳇, 케이트 윈슬렛, 마리옹 꼬띠아르 등이 모두 출연을 고사해 프랑스에서 제작됐다. <원초적 본능>으로 폴 버호벤과 인연을 쌓은 샤론 스톤도 출연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역할은 프랑스의 연기파 배우 이자벨 위페르에게 돌아갔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역할이라면 아주 작은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온 이 연기자는 2001년작 <피아니스트>를 통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엘르>는 그녀에게 또 한 명의 거장과 작업하는 기회이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는 만만찮은 도전이 되어준 것으로 전해졌다.

제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에도 노미네이트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셋] <옥자>

ⓒ 넷플릭스


봉준호는 누가 뭐래도 한국영화계 최고의 스타감독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난 4년 간 수많은 영화가 우리 곁을 찾았으나 결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영화팬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그가 기대작 <옥자>를 내놔 관심이 집중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칸영화제 출품을 시작으로 한국에선 6월 29일 넷플릭스 서비스와 극장 동시 배급이 확정됐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선 극장에서 상영하는 기존 배급방식 대신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만 배급하기로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칸영화제는 극장개봉을 않는 영화는 내년부터 공식 초청작 선정에서 배제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기도 했으나 영화제의 외연을 스스로 좁히는 짓이라는 비판도 만만찮은 상태다. 다만 기존의 제작·배급시스템이 감독의 결정권을 일부 침해해온 상태에서 넷플릭스 배급의 존재가 창작자들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랬듯 봉준호는 정통 장르영화와 B급 냄새 진동하는 영화로 경력을 시작해 어른들이 볼 수 있는 동화로 필모그래피를 확장했다. 촌스럽고 무리하게 느껴지는 설정이지만 봉준호라는 작가가 걸어온 길과 제이크 질렌할, 틸다 스윈튼의 존재가 좀처럼 의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 가운데 현대사회 및 삶에 대한 은유를 집어넣길 즐겨온 그가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관객 앞에 풀어놓았을지 기대가 크다. 내 마음은 벌써 극장으로 향해 있다.

[넷] <박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되찾은 들판에서 부담없이 배급될 독립운동가 관련 영화가 28일 개봉한다.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사극애호가 이준익 감독의 <박열>로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대신 경쾌한 작품으로 완성됐다는 평이다. 젊은 남자배우 가운데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이제훈이 주인공 박열 역을 맡았고 다른 배역은 비교적 생소한 배우들로 채워졌다. 배우들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재능을 뽑아낼 줄 아는 이준익 감독의 역량이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 상업영화 <동주>를 히트시키며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이준익 감독은 이번에도 한국영화 제작비 평균에 못미치는 26억원을 들여 영화를 완성했다. 최근 이준익 감독의 행보는 넷플릭스 제작영화를 감독한 봉준호 감독의 그것 만큼이나 주의깊게 지켜볼 만하다.

영화는 동경대지진 이후 6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본제국에 대해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맞서 싸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박열은 파란만장하며 매력적인 독립운동 업적에도 사회주의자이자 북한에 납북돼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껏 평가절하돼온 인물이다. 다시금 이땅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오늘 이 영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다섯] <다크 하우스>

ⓒ (주)스톰픽쳐스코리아


할리우드 공포영화 연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대런 린 보우즈만의 신작이다. <쏘우> 시리즈를 2편부터 맡아 연출하는 등 지금껏 십여편의 공포물을 만들어낸 그가 연쇄살인 사건 끝에 모든 가족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또 한 편의 공포스릴러를 빚어냈다. 무려 5년여에 이르는 제작기간이 말해주듯 감독은 영화의 여러 면모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듬고 매만졌다. 덕분에 시체스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호평도 받았다.

유난히 부정적인 사건과 마주한 개인들이 단서를 모아 음모를 풀고 범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많이 개봉하는 한 달이다. <다크 하우스>는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충만하다. 이미 대런 린 보우즈만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공포마니아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기술을 넘어 의미를 담고자 했다'는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빚었을지 기대가 상당하다. 6월 중 개봉.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엘르 옥자 박열 김성호의 씨네만세 기대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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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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