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아이돌 팬들은 '예술 소비자'로 이해받지 못한다. 아이돌이 아이돌로 불리기 시작한 첫 세대 가수인 H.O.T. 문희준의 팬 커뮤니티는 최근 문희준의 활동에 보이콧 선언을 했다. '댓글'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보이콧을 옹호하는 댓글은 거의 없다. '20년 넘게 팬 하는 것이 한심하다'거나 '뭘 이런 걸로 성명씩이나 내냐'는 반응만 수두룩하다.

만약 이것이 어느 시립교향악단에 대한 보이콧이나 어느 순수미술 화가의 작품 구매 보이콧이었다면 어땠을까. 대중들은 적어도 보이콧하는 이들이 왜 보이콧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유 정도는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20년간 소비자로서 들인 비용과 팬으로서 쏟아부은 열정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조금은 더 많지 않았을까.


명백한 보이콧 이유,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되나

해당 팬 커뮤니티가 밝힌 보이콧의 이유는 명백하다. 아예 번호까지 붙여서 성명을 냈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이렇다. 8미터 내 접근 금지 등의 규율을 만들고, 조악한 품질의 팬 상품을 만들어 판매했으며, 크레용팝 소율과의 결혼 과정에서 혼전임신이 아니라는 거짓말 등을 했다는 것.

8미터 접근 금지가 뭐가 문제냐고? 엄숙한 예술을 좋아하는 이들 눈엔 쉬워 보이겠지만, 아이돌 문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게 '얼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는 그 자체로 상품이다. 팬 사인회를 하더라도 악수나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사인회는 경쟁률이 높아지고, 사인회 당첨률을 높이기 위한 음반 판매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콘서트만 봐도 그렇다. 음향 및 좌석의 질이 티켓 가격을 좌우하는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아이돌 가수의 공연은 무조건 가수와 가까운 객석일수록 빨리 팔린다.

물론, 팬들에게 일정한 물리적 거리를 요구하는 것은 자연인 문희준에게 지극히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가수와의 물리적 거리가 곧 팬과 가수의 의리이고 심지어 돈인 아이돌 문화에서, 8미터라는 구체적인 요건을 달았을 땐 팬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설명도 함께였어야 한다. 문 씨의 보행이나 시야 확보 등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도록 그를 충분히 배려했음에도 단순히 8미터 안쪽이란 이유로 접촉을 거부당했다면, (심지어 몇몇 팬들은 문 씨의 요청으로 그를 찾았다) 팬들의 배신감은 당연하다.

결혼 과정에서의 거짓말 역시 마찬가지다. '희준부인', '쭈니마누라' 같은 버디버디 아이디를 썼던 이들도 그와의 결혼은 현실이 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그와의 서사를 그리며 소녀 시절을 그려나갔다. 문희준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결혼은 그의 권리지만, 팬들에겐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멤버 전원이 결혼한 S.E.S.나 유키스, 슈퍼주니어의 일부 멤버, 원더걸스 출신 선예 등이 결혼 전에 팬들을 위해 정성 어린 이벤트를 갖고, 밝힐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미리 밝힌 것은 아이돌 스타와 팬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물론 그 예의, 안 지켜도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최소한의 것을 외면하면서도 계속 팬의 사랑을 받길 바랐다면 그건 교만이다.

팬 상품의 조악함은 말할 것도 없다. 꾸준히 활동해온 신화나 재결성해 활발히 활동 중인 젝키와 달리 H.O.T.는 오랜 세월 활동이 완전히 중단됐고 현재 남아있는 팬들 중 해체 후 새로 유입된 팬들은 거의 없다. 즉, 이들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H.O.T.를 좋아했던 이들이고, 동시에 30대 이상의 나이가 돼 자립적 경제력과 소비자로서의 경험을 충분히 축적했다. 조악한 팬 굿즈에 대한 분노는 H.O.T.에 대해 의리를 지킨 세월만큼이나 깊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H.O.T.는 10대 시절 그 자체 아니었던가.

나는 H.O.T.의 팬은 아니었다. 흰 풍선을 들고 콘서트장 앞에서 하룻밤을 지새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돌 1세대 가수의 팬으로서 문희준 팬들이 가진 분노의 무게감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갖는 분노가 '아이돌 가수'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로 쓸데없거나 한심한 것처럼 보는 일각의 시선이 무척 안타깝다.

 문희준 소속사 코엔스타즈와 문희준의 공식 입장.

문희준 소속사 코엔스타즈와 문희준의 공식 입장. ⓒ 코엔스타즈


사흘 만에 문희준은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팬들이 문희준 보이콧에 조목조목 이유를 단 것과는 달리 문희준은 '진심을 담고 싶다'면서도 '무엇에 대해 미안한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의 대소, 사실관계를 떠나'라는 표현으로 시각에 따라 가볍게 볼 수도, 사실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모두가 '20년을 덕질한다'며 허투루 보더라도 적어도 그만큼은 그러면 안 된다. 대체 뭐가 미안하단 건지, 보여주고 싶은 진심이 뭔지조차 알 수 없는 해명 글은 그렇게 또 하나의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나는 문희준 팬들의 보이콧이 실질적으로는 문희준에 대한 마지막 경고라고 생각한다. 문희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팬에게 대답다운 대답을 들려주길 바란다. 나아가, 아이돌 팬들이 문화 예술의 소비자로서 떳떳하게 인정받길 바란다. 자신이 지불한 비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이 쏟은 열정에 대한 예의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팬들의 당연한 권리이기에.

문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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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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