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극, 특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여성 캐릭터에게 제한적인 역할과 성격을 부여하고는 했다. 하지만 채수빈이 연기한 인물들은 달랐다. 라온(김유정 분)을 사랑하는 세자(박보검 분)에게 "국혼을 피할 수 없다면, 나와 내 집안을 이용하라"라고 당차게 청혼하던 <구르미 그린 달빛>(아래 <구르미>)의 하연이도, 공화(이하늬 분)가 떠난 뒤 찾아온 길동(윤균상 분)에게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나만 너 기다렸다"라고 웃던 <역적>의 가령이도 그랬다. 모두 사극에서 보기 힘든 당차고 용감한 캐릭터였다.

하연이와 가령이는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캐릭터 모두 기존 사극에서 만나기 어려운, 매력적인 역할이다. 결과적으로는 <구르미>와 <역적> 모두 잘 되어 '배우 채수빈'을 대중에게 깊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인 배우에게 연이은 사극 출연은 분명 모험. 지난 18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채수빈은 "주위에서 하연이와 가령이가 비슷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긴 했다"라고 전했다.

"주변의 우려는 있었지만, 하연이와 가령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온, 다른 인물이에요. 하연이는 내가 먼저고, 내 감정이 우선인, 이기적인 성향이 있어요. 하지만 가령이는 사랑에 모든 걸 걸고, 헌신적인 아이죠. 다른 캐릭터이기 때문에 (저는) 걱정 없었어요."

겁쟁이 채수빈, 용감무쌍 가령이

채수빈, 보호본능 자극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채수빈, 보호본능 자극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하연이도, <역적>의 가령이도, 기존 사극 속 여성 캐릭터와는 분명 달랐다. ⓒ 이정민


채수빈은 자신은 "가령이 보다 하연이를 더 닮았다"라고 말했다. 가령이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당차지만, 자신은 겁도 많고, 사랑에 있어서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채수빈은 그래서 자신과 다른 가령이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단다.

"저는 서방이 죽었다고 하면 울고만 있었을 거예요. 어휴, 궁에 어떻게 가요. 저랑은 반대죠. 그래서 더 가령이가 부럽고 멋있었죠. 가령이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돌아올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도 받은 사랑을 모두 주는 사람이에요. 시청자분들도 그래서 '직진 가령'이라고. (웃음) (가령이를) 연기하면 할수록 씩씩한 가령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채수빈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겁이 많다"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직업. 그는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다"라고 고백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 익숙해질 만하면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견딜 수 있었던 건, 그 스트레스를 이기고도 남을 행복감과 즐거움 덕분이다. 이젠 사람과 친해지고, 새로운 역할에 대해 알아가는 것들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그는 자신의 단점으로 "감정 신 찍을 때 기복이 심한 것"을 꼽았는데, 감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때는 집중이 잘 안 되어 애 먹을 때가 많았단다. 하지만 <역적>에서는 달랐다. <역적>의 가령이는 채수빈에게 연기에 대한 즐거움은 물론, 희열까지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처음에 가령이라는 인물을 만들 때, 감독님께 이것저것 많이 여쭤봤어요. 얘는 어떤 삶을 살았어요? 어떤 가족 밑에서 자란 거예요? 성향은 어떤 아이예요? 근데 감독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가령이로 살면서 놀고 즐기면 돼' 하시더라고요. 혼란스러웠지만 다 내려놓고, 감독님을 믿고 의지했죠.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가령이가 돼 있는 거예요. 가령이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죠. 

다음 작품에서도 (이번처럼)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감독님이 한 번 경험해봤으니,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시더라고요. (웃음)"

첫 키스 신 상대는 윤균상 아닌 조재현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적>은 채수빈에게 배우로서 여러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줬다. 윤균상과의 키스신도 그 중 하나였다. ⓒ 이정민


<역적>은 채수빈에게 배우로서 여러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줬는데, <구르미>에서 짝사랑에 그쳤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일도 그중 하나다. 앙숙으로 만나 오누이로, 다시 연인으로, 부부로 발전해가는 윤균상과의 러브 라인은 또 다른 재미요소. 두 사람의 첫 키스 신은 가령을 누이로만 여기던 길동이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내보인 장면이었다.

이 키스는 길동과 가령에게도 처음이었지만, '드라마' 배우 윤균상과 채수빈에게도 첫 키스 신이었다. 방영 당시 공개된 메이킹 영상에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두 배우의 풋풋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채수빈에게 그날의 분위기를 물었더니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사실 첫 키스 신은 따로 있다"라며 웃었다.

"드라마에서는 <역적>이 처음 맞는데요, 제 첫 키스 신 상대는 연극 <블랙버드>에서 조재현 선생님이셨어요(관련 기사: 40살에게 성폭행 당한 12살 소녀... 왜 가해자를 찾아갔나). 제가 (조)혜정 언니랑도 친해서 집에도 놀러 가고, 밥도 먹고, 그렇게 선생님이랑 친구 아버지처럼 지냈거든요. 그런데 키스를 하려니까 너무 민망한 거죠. (웃음) 선생님도 연습할 때 '얘랑은 못하겠다'라고 하시고. 하하하. 근데 막상 무대 올라가니까 민망한 감정이 눈곱만큼도 안 들고 몰입이 되더라고요. <역적>에서도 그랬어요. 균상 오빠랑 키스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색하지만, 길동이와 가령이잖아요. 가령이가 되니 민망함은 사라지고, 그 감정에 푹 빠질 수 있었어요."

가령은 <역적> 후반부 갈등의 큰 축이었다. 길동이 죽었다고 생각해 스스로 궁으로 간 가령은, 서슬 퍼런 임금 연산(김지석 분)에게 저주를 퍼붓는가 하면, 인질이 된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길동을 향해 "나 때문에 돌아서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라고 절규한다. 초반 솔직 발랄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었던 가령의 한 맺힌 오열은 안방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적> 첫 회에도 등장하는 이 장면. 눈 밝은 시청자들은 눈치챘겠지만, 후반부 장면은 재촬영된 것이다. 같은 대사, 같은 상황. 하지만 본격적으로 가령이가 되기 전과, 6개월 동안 가령이로 살아 낸 뒤는 분명 달랐다.

"첫 회 촬영은 1월이었는데 너무 추웠어요. 입이 얼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데다 장대 올라가는 게 무서웠죠. 그냥 주어진 연기만 했어요. '추워 죽겠다' 이런 느낌이 전부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후반부에 다시 장대 올라갔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가령이의 고통이 진심으로 느껴졌죠. 그땐 서방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어요. 같은 연기인데 이렇게 달리 느껴질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이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잖아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대선 맞물린 <역적>의 절정... "묘했다"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적> 속 민초가 되어, 그들의 울분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채수빈. 현 시국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 더 남달랐다. ⓒ 이정민


채수빈은 <역적>의 가장 멋진 장면으로 연산과 길동의 마지막을 꼽았다. 길동이 폐주로 전락한 연산을 찾아가 "이융 너의 죄는 진짜 위를 알아보지 못하고 위를 능멸한 죄, 능상"이라 외치는 장면이다. 늘 위아래를 중시하고, 폭력과 강압으로 군주의 위엄을 세우려던 연산에게, 진정한 위는 '백성'임을 알려준 대사. 채수빈은 "우리 드라마지만 대사가 너무 소름 돋을 정도로 좋더라"라며 감탄했다.

<역적>은 현 시국과 우리의 근·현대사를 연상시키는 듯한 이야기로 큰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직접 <역적> 속 민초가 되어, 그들의 울분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채수빈이니만큼,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물론, 현 시국도 더 남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백성의 힘으로 왕을 몰아낸 드라마의 이야기인 건데, 딱 우리의 현재 상황이잖아요. 드라마와 현실의 결말이 달랐다면 마냥 판타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더 감격스럽고, 크게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촬영 도중 있었던 대통령 선거 역시 남다른 감동이었다. 1994년생인 채수빈의 첫 대선 투표였다.

"대선 투표는 처음이었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내 손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자를 뽑는다는 게 너무 신기했죠. 개표 방송에 숫자 막 올라가잖아요. 그중 하나가 제 표라는 게 뿌듯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웃음)"

연기의 재미 알아가는 3년 차 신인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채수빈은 "연기가 점점 좋아진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흔한 발연기 논란 한 번 없었지만, '배우 채수빈'에 대한 기대가 쌓이는 만큼, 앞으로는 부담도 커질 터. 채수빈은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 이정민


데뷔 3년. 여전히 '신인'이지만, <구르미> <역적>에서 연이어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그. 이제는 '가장 기대되는 20대 배우' 중 한 사람이 됐다. 지금까지 잘 해오고 있는 것 같은지 묻자,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라며 씩씩하게 말했다.

"연기가 점점 좋아져요.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폭도 넓어지는 것 같고요. 물론 그만큼 부담감도 점점 생기는 것 같아요. 전에도 물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부족할 수밖에 없지 뭐' 이런 마음을 가졌거든요. 진짜 그런 삶을 살아본 것도 아니고,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비난받겠지 생각하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땐 제게 기대치가 없어 그런지, 보시는 분들이 관대하게 평가해주셨어요. 하지만 이젠 다르겠죠. 더 새로운 모습,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분명 힘든 점도 있지만, 아직은 힘든 것보다 연기하는 행복이 더 크고, 사랑받는 게 감사해요."

갈고 닦은 '무술 실력'은 후속작에서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가네 식구들과 함께 싸우려던 가령이의 결말이 바뀌면서, 애써 갈고 닦은(?) 무술 실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 이정민


채수빈은 "사실 가령이가 후반부에 싸움을 배워서 홍가 식구들이랑 같이 싸우는 계획이 있었다"라며 "무술 연습도 했었다"라고 귀띔했다. "무술 연기를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기회만 있었다면 잘할 수 있었는지 묻자 "무술 감독님이 칭찬해주셨다"라고 자랑하듯 말했다.

갈고 닦은(?) 무술 실력은 후속작에서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최근 출연을 확정한 KBS 2TV <최강배달꾼>에서 무술 유단자 이단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6개월 대장정을 마친 뒤, 별다른 휴식 기간 없이 결정한 후속 작품이다. <구르미> <역적> 등 사극으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채수빈의 현대극. 채수빈은 "캐릭터가 통통 튀고 재미있다"라며 웃었다.

"작품 할 때마다 캐릭터가 가진 성격도, 매력도 다르잖아요. 다양한 역할 많이 하면서 저랑 맞는 역할, 저만의 매력을 느끼고 싶어요. 언젠가는 독하고 강한 역할도 해보고 싶고, 정작 청순가련한 역할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것도 욕심나네요. 로맨틱 코미디도 해보고 싶은데, 음…. 제가 웃음이 너무 많아서. 하하하."

채수빈은 "가령이를 연기하며, 배우로서 성장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멋지고 예쁘게 가령이를 연기해냈지만, 아직 배우로서 성장기이니만큼 본인도, 지켜보는 이들도, 앞으로에 더 큰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다. 어서 가령이를 떨쳐내고, 새로운 캐릭터를 입어야 할 채수빈에게, 가령이와, 가령이를 사랑해준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부탁했다. 채수빈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일기를 쓴다"라며 말을 골랐다.

"우선, 그동안 가령이를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5~6개월 동안 울고 웃으며 너무 행복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가령이는 정말 배우고 싶은 부분이 많은 친구예요. 어린 나이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밝고 씩씩하게 자랐잖아요. 그만큼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길동이와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요. (웃음)"

채수빈, 보호본능 자극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MBC월화특별기획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가령 역의 배우 채수빈이 19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역적 채수빈 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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