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후> 관련 사진.

영화 <그 후>를 잘 읽으려면, 개인적인 맥락을 제거하고 보는 편이 더 낫다. ⓒ 전원사


홍상수 감독의 <그 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의 작품 중 가장 '여성주의적인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작품에서 그가 페미니즘을 직접 주장하진 않는다. 여전히 주요 사건의 중심엔 지질한 남성이 서 있고, 일종의 권력(이 영화에선 문학 권력)을 쥐고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후>가 여성주의적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배우 김민희와의 교제 인정으로 최근 작품들이 그랬듯 이 영화도 그 맥락 안에서 국내 관객에게 해석될 여지가 크지만, 영화 속 여성들은 그 자체로 주체적이게 묘사됐다.

복수를 꿈꾸는 여자

영세한 출판사를 운영하는 봉완(권해효)은 회사 직원 창숙(김새벽)과 부적절한 관계로 아내 해주(조윤희)의 분노를 산다. "뭔가 표정이 변했어"라며 그의 외도를 넌지시 떠보는 해주는 시큰둥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봉완을 질책하고 질타한다. 수십 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이렇다 할 감흥이 없는 봉완은 창숙에게만은 열정적이다. 결국, 이 사달로 창숙은 출판사를 떠나고, 그 자리를 만희(김민희)가 채운다.

면접을 가장해 가족 관계, 취향, 심지어 불행한 가족사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봉완에게 만희는 묘한 태도를 취한다. 출근 첫날 출판사로 찾아온 창숙에게 뺨까지 맞는 일을 겪고, 어디선가 나타난 창숙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날 처지가 됐지만 잠깐 욱한 뒤로 의연하게 대처한다.

이를 두고 처를 두고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홍상수 감독 본인에 빗댈 것인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적어도 그렇게 읽어낼 만한 요소가 많았지만, <그 후>에선 오히려 개인적 맥락을 제거해 볼 것을 추천한다.

 영화 <그 후> 관련 사진.

영화 <그 후>는 지금까지 홍상수의 작품 중 가장 여성주의적인 영화이다. ⓒ 전원사


몇 번의 시간 역전이 제시된 후 <그 후>는 출판사를 떠난 만희가 어느 날 갑자기 봉완을 찾아오는 장면을 제시하며 극점으로 치닫는다. 물론 만희의 표정은 무심하다. 그리고는 봉완의 근황과 상태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수십 년을 함께 산 여자와 단 하루 같이 일한 여자의 발언이 같다. 두 여성은 봉완의 변곡점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봉완 역시 거짓말이 금방 들통나고 마는 상당히 순수한 인물일 수는 있다. 중요한 건 두 여성이 그걸 정확히 짚었다는 사실이고, 전자가 심히 분노했다면 후자는 무서울 만큼 담담하게 대한다는 것.

사적인 영역에서 해주는 남편의 마음에서 거세당함으로 큰 절망과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희는 공적 영역에서 큰 수모를 당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만희는 앞서 봉완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과 그 화법을 고스란히 끌어와 역으로 던졌다. 이 지점에서 만희는 일종의 심리적 복수를 강행한 셈이다. 애써 찾지 않아도 될 단 하루의 상사를 찾아와 궁금하지도 않을 근황을 묻는 행위로 말이다.

숨은 상징들

<그 후>의 공식 상영회가 진행된 뤼미에르 극장에선 간간이 만희의 이런 화법에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이 많았다. 흑백 화면에 극적 사건이 없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사들로 키득거리는 등 관람 분위기 자체는 꽤 역동적이었다.

이 영화에 숨은 몇 가지 주요 상징을 찾아보았다. 일단 제목 <그 후>는 the day after로 영제가 붙었는데 극 중 봉완이 해주에게 나쓰메 소세키 책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해당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음을 알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 후>(영제는 And Then) 등을 통해 주요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칸 영화제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 진출한 <클레어의 카메라>와도 연결고리가 있다. 칸 시내 풍광을 담은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캐릭터들은 종종 중식당을 찾는다. <그 후>에서도 주인공들은 사무실로 배달시키거나 혹은 직접 방문해 중식을 먹는다. 홍상수 감독 개인 취향이 담긴 대목이다.

<클레어의 카메라>가 클레어(이자벨 위페르)의 눈을 통해 한 인물이 지닌 역동성을 간파한다면, <그 후>는 두 인물(해주와 만희)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한 인물의 위선 내지는 거짓을 고발한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았든, 단 하루를 경험했든 여성의 감각에서 남자의 빈틈은 그렇게 들통나고 마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두 작품 모두 홍상수 감독이 (아마도) 최초로 선보이는 꽤 훌륭한 여성주의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평점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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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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