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의 1인 13역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매니페스토>의 포스터.

케이트 블란쳇의 1인 13역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매니페스토>의 포스터. ⓒ 찬란


케이트 블란쳇이 1인 13역을 맡아 화제가 된 <매니페스토>(2016, 율리안 로제펠트 연출)는 본래 미디어 아트 전시로 기획된 작품이었고, 실제로 몇몇 미술관에서 멀티채널 형태로 상영되었고 이후 편집을 거쳐 극장 상영용 영화가 되었다.

한 영화에서 13개의 캐릭터로 분한 케이트 블란쳇은 같은 인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면마다 놀라운 변신을 꾀한다. 영화의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케이트 블란쳇의 팔색조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올해 열린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당시에는 케이트 블란쳇이 13개의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한 사실이 더 주목받긴 했다. 하지만 <매니페스토>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20세기를 대표한 예술가, 사상가들의 혁명적 선언을 대사로 인용해 되새김질하고자 하는 심오한 영화다. 1인 13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에만 몰두하기엔, 이 영화가 가진 매력들이 너무나도 많다.

1인 13역 케이트 블란쳇, 그 외의 매력

애초 13개의 멀티채널로 구성된 <매니페스토>에는 프롤로그를 포함 13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프롤로그에는 케이트 블란쳇이 등장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만 나와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등을 읽는다. 이윽고 노숙자로 변신한 케이트 블란쳇이 예술을 과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혁명적 발언을 늘어놓는데,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읊조리는 모든 대사가 20세기에 등장했다 사라진 수많은 예술적 선용들을 인용한 문구들이다.

<매니페스토>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노숙자부터 시작해서 금융 브로커, 쓰레기 처리반 노동자, 장례식 연설가, 과학자, 가정주부, 성공한 사업가, 펑크족, 무대감독, 앵커와 기자, 교사 등 다양한 인간 군상 등을 동시에 보여 준다. 케이트 블란쳇이 다른 캐릭터로 변신을 시도할 때마다, 인용되는 예술적 사조, 선언들도 달라진다. 가령, 기 드브로로 대표되는 상황주의의 선언으로 꾸며진 에피소드에서 노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장례식에서 연설하는 빨간 머리의 케이트 블란쳇은 말끝마다 '다다'를 외치는 다다이즘의 사조를 주지시킨다. 이외에 미래주의, 건축, 절대주의(구성주의), 팝 아트, 창조주의(스트리덴티즘), 추상표현주의, 퍼포먼스(플럭서스), 초현실주의(공간주의), 개념주의(미니멀리즘), 영화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다양한 예술적 사조들이 연이어 등장해 보는 이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여러모로 복잡하고도 머리 아프게 하는 영화이지만, 그런데도 <매니페스토>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다. 13개의 다양한 캐릭터를 맛깔스럽게 소화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명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을 통해 20세기에 등장했던 예술적 선언들을 돌아보게 하는 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 찬란


<매니페스토>는 왜 과거를 이야기하나

<매니페스토>에 등장하는 예술적 선언과 사조 모두 지금까지 명맥은 유지되고 있지만, 이들이 꿈꾸었던 혁명적 기조는 더 유효하지 않다. 가령 <매니페스토>의 영화 관련 에피소드에도 잠깐 등장하는, 1995년 '도그마 선언'으로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테르베르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영화감독이지만 현재의 그들 또한 '도그마 선언'대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매니페스토>에 등장한 예술 사조 중 현대인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오는 단어는 '미니멀리즘'인데 예술적인 기교가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본질을 추구하는 본래의 의미 대신 심플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통용되는 분위기이다.

그러면 <매니페스토>는 왜 과거에 지나지 않는 수많은 사조를 인용하고 되새김질하려고 했을까. 케이트 블란쳇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하는 '영화' 에피소드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Nothing is original(독창적인 것은 없다)"은 짐 자무시의 말을 인용한다. 20세기 등장했던 예술 사조들은 대부분 과거 있었던 예술적 전통과 결별하고자 했고, 새롭게 등장하는 예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조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사조들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매니페스토> 안에서 20세기의 수많은 예술 사조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에 대한 저항과 죽음을 통해 예술가들의 자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예술을 요구하고자 한다.

ⓒ 찬란


독창적인 것이 없다는 짐 자무시의 말처럼, 이전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도그마 선언'은 사실상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그마 선언을 주창했던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테르베르조차 도그마 선언대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도그마 선언을 무의미하고도 쓸모없는 객기로 치부할 수 있을까. 시대의 명배우 케이트 블란쳇을 앞세워 20세기의 혁명적 예술 선언을 돌아보고자 했던 <매니페스토>는 예술 선언문의 인용을 통해,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장 뤽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여 "문제는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이다"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 같지 않은 영화다.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일반 예매 오픈 후 1분 만에 전석 매진되어 이례적으로 추가 상영까지 들어가기도 했던 <매니페스토>는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스크린 문학전 2017'에서 만날 수 있다. 이후 극장 개봉 형태를 통해 국내 관객들과 정식으로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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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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