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 MBS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놈들이 지배하던 공포를,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 - <진격의 거인> 도입부 대사 중에서

주인공 엘런 예거는 작중에서 말한다.

"평생 벽 안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밥 먹고 잠만 자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마치, 가축 같잖아."

그리고 다짐한다.

"바깥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벽 안에서 사는 건 싫어!"

자 거인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방송인 서장훈이 아닌 진짜배기 괴물 거인 말이다. 심지어 그 거인이 별안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먹으려고 달려온다면 여러분은 맞서 싸우겠는가? 도망치겠는가? 엘런은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만화 <진격의 거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과 거인으로 구축한 세계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 MBS


작품의 세계관을 살피면서 논의를 본격적으로 이어가보자. 팔라디섬 중앙부 50m 높이의 성벽 안에는 엘디아인이 거주한다. 엘디아인은 거짓을 진실로 여기며 살아왔다. 왕은 왕실(레이스 가문)의 혈통만 발휘할 수 있는 '기억 조작능력'으로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꿨다. 대다수 엘디아인들은 벽 안에 갇히게 된 이유를 깡그리 잊었다. 교과서는 정체불명의 식인거인의 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가 벽을 쌓아 안전을 확보했다고 기록했다. 바깥세상은 거인이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곳이니 '벽 안에서만 머물라' '가만히 있으라'는 교육이 이뤄졌다. 기록된 역사에 대한 의문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바깥을 궁금해 하는 (엘런 같은) 이들은 비웃음 당했다.

100년이 넘도록 벽 안에서 평화를 누리던 엘디아인. 갑작스레 벽이 무너지더니 거인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사지가 절단되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고통에 절규가 울려 퍼진다. 희망 따위는 없다. 왕정과 군부(軍部)의 지휘체계는 엉망이고 거인에 맞설 방법은 없다. 민중은 더욱 깊숙한 또 다른 벽 안으로 숨어 애써 공포를 억누른다. 공포가 이성을 대체하고 무기력감에 휩싸인 시기가 이어진다. "바깥이 그토록 끔찍하다면 나의 삶은 지금과 같은 우물 안 개구리로 충분해"라는 가치관이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벽 안을 에워싼다.

하지만 거인이 어머니를 잡아먹는 순간을 지켜본 소년만큼은 달랐다. 소년, 성장해 조사병단 소속 군인이 된 엘런은 '거인을 모조리 몰아내고 벽 바깥으로 나가서 바다를 보겠어!'라며 의지를 불태워 열심히 훈련한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동지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서 바다에 다다른다. 진실을 은폐하던 왕정도 무너뜨린다. 수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만 여전히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자신들을 악마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다 너머 대륙에 생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엘런과 벽 안의 엘디아인은 명운을 건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

'벼락인기'의 비결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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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거인의 공포라는 소름 끼치는 가상현실을 역동적인 미스터리 활극으로 풀어낸 '다크 판타지' <진격의 거인>은 지난 2009년 10월 코단샤(講談社)가 발행하는 월간잡지 '별책 소년 매거진'을 통해 첫선을 보였다. 2016년 12월 기준 일본에서만 단행본 6000만 부 이상이 판매됐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엄청난 '초대박'을 터뜨렸다.

현재 단행본이 22권까지 나왔으니 단순계산을 해 보면 한 권꼴로 300만 부가 넘게 팔린 셈이다. 2000년대 이래 한동안 주춤하던 만화 왕국 일본이 <진격의 거인> 열풍에 힘입어 다시금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과장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국민 예능 <무한도전>은 지난 2013년 9주년 특집 때 진격의 거인을 패러디한 '진격의 준하'를 선보였다. 그밖에 신문 만평 등에서도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했다. <진격의 거인>은 피 튀기는 살육장면을 고스란히 담은 수위 높은 일본애니메이션이 널리 인기를 끈 첫 사례다. 이와 관련해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제목 자체가 인상적이고 유희하기 좋다. 인간을 억압하는 거인은 폭력성을 상징하는데 폭력은 한국 사회에도 만연하기 때문에 패러디할 요소가 많다"고 분석한 바 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1998년 국민의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개방 이후 <포켓몬스터>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은 꾸준히 대중의 호평을 받아왔다. 이들 작품은 신비로운 이세계(異世界)로 떠나는 모험, 전투 이후의 성장 등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낭만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은 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꿈은커녕 지나치게 냉혹하고 잔인하다. 등장인물은 동료가 거인에 잡아먹히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본다. 버팀목이 될 고참 선배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통에 후배들이 정신-육체적으로 성장할 짬도 거의 없다. 동료 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도 잠시 곧이어 얼마 전까지 왁자지껄 웃던 이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야말로 고구마 100개를 입에 쑤셔 넣은 듯한 답답함이 내내 펼쳐진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움을 풀풀 풍기는데 대중은 왜 열광할까? '그런데도 끊임없이 벽을 넘어 싸운다면 기어코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강력한 울림이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또 "주인공이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나약한 인물"이라는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갑자기 어디선가 뿅 나타나는 영웅이 아닌,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인물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치열하게 노력한다는 점도 구미를 당긴다.

우익 논란, 충분치 않은 해명

 <진격의 거인>의 표지는 각 권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은 주인공이 처음으로 거인과 맞서 싸우는 장면, 17권은 주인공이 같은 기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장면, 22권은 주인공이 바다에 도달한 장면을 나타낸다.

<진격의 거인>의 표지는 각 권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은 주인공이 처음으로 거인과 맞서 싸우는 장면, 17권은 주인공이 같은 기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장면, 22권은 주인공이 바다에 도달한 장면을 나타낸다. ⓒ 박명훈


<진격의 거인>에 대한 평가가 반전된 건 그 이후였다.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작품이 우익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경술국치의 통탄을 가슴에 새긴 한국인의 국민정서상 비판이 쏟아질 법했지만, 처음 여론은 그리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일본 우익의 논리를 대변한다는 확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가 트위터 비밀 계정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망언을 쏟아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판이 뒤집어진다. 누리꾼이 단행본을 한꺼번에 불태우는 '현대판 분서갱유' 인증 샷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등 "진격의 거인, 한국에서 사라져라"를 외치는 여론도 끓어올랐다.

최근 <진격의 거인>은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돌아왔다. 이전보다는 인기가 한풀 꺾였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방영을 시작한 '2기 애니메이션'은 팬들 사이에서 "역시"라는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동시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우익 논란은 여전하다. 작품은 세간의 주장처럼 식민지배의 반성 없이 군사 대국화를 꾀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를 담은 것일까? 여주인공의 이름 미카사를 옛 일제 해군 전함에서 따온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또 작가는 극우 성향 작가로 유명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작품 창작에 참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작가의 발언을 살펴보자. 이사야마는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일본이 오른쪽으로 가지 않을까, 만화의 인기가 그걸 보여주는 것 아닐까라는 질문일 텐데.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그렇게 갈 것 같지 않다. 옛날에 주변국들에 엄청난 폐를 끼친 일이 있었지만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패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와 격리돼 있다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순간에 그런 식으로 폭주한 것이다. 패전을 겪은 이상 다시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 최원석 기자, <조선비즈>, "食人거인의 공격에 반격하는 인간… 단순한 플롯이 '진격의 거인' 성공 비결"(2013년 11월 1일) 중에서

분명 발언 내용만으로는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대학생의 취향을 정면으로 저격한 대학가 근처의 한 만화방. 퀘퀘한 담배연기가 자욱했던 이전 만화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다만 일본만화의 인기만큼은 여전하다.

젊은 대학생의 취향을 정면으로 저격한 대학가 근처의 한 만화방. 퀘퀘한 담배연기가 자욱했던 이전 만화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다만 일본만화의 인기만큼은 여전하다. ⓒ 박명훈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일치시키지 말고 분리해 판단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구상해 엮어내는 이들이 있다.

이사야마는 어릴 적 태어난 고향의 환경, 약골이었던 자신이 괴롭힘당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회상한다.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사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어떤 공포나 위협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삶 자체가 강자에게 휘둘려 열등감에 휩싸이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그 영향이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할 수 있다. 진보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에서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 전투기로 유명한 제로센(零戰)을 만든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를 티 없이 순수한 청년으로 묘사해 크게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최소한 <진격의 거인>에는 미화된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이런저런 감정을 분출한다. 주인공 엘런이 뒤틀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목소리 높여 해방을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점, 그의 성인 예거(Jager)가 독일어로 '사냥꾼'을 뜻한다는 점에서도 이사야마가 극우세력의 논리를 고의로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다르게 생각하면,  엄격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는 봉건체제, 등장인물이 그 체제를 해체한 뒤 민중에게 '우리는 온 세상 인류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진실을 알리게 되는 경로를 상세하게 그렸다. 소름 끼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했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현실의 뉴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종종 목격할 수 있는 귀족과 상인의 더러운 밀거래, '벽'이 인류를 수호한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한 월(WALL)교의 사제들이 거짓 신앙을 제작해 기득권을 떠받치는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종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진격의 거인>이 어떤 결론을 맺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 엘런과 동료들은 엘디아인의 생존을 건 세상과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촛불 혁명으로 정권교체를 일궈낸 이래 여러모로 기분 좋은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에게는 또다시 싸워야 할 상대(거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엘런의 입을 빌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묻고 싶다.

"여러분은 싸울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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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 일본의 동향에 큰 관심을 두며 주시하고 있습니다. 적폐를 깨부수는 민중중심의 가치가 이땅의 통일, 살맛나는 세상을 가능케 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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