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토마토를 가득 실은 트럭이 도로에 넘어져 있다. 흩어진 토마토 곁에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다하이(大海)가 공놀이하듯 토마토 하나를 던지며 섰다. 두 번째 스토리의 주인공 싼얼(三儿)이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는데 갑자기 강도 세 명이 길을 막고 돈을 요구한다. 싼얼은 총을 꺼내 그들을 모두 살해한다. 그리고 토마토 사고현장을 유유히 지나간다. 다하이가 토마토를 먹기 위해 입에 가져가는 순간 멀리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난다.

쓰러진 토마토와 폭발 영화의 시작 장면에 영화 전체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 쓰러진 토마토와 폭발 영화의 시작 장면에 영화 전체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짧은 장면은 영화 전체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쓰러진 트럭과 흩어진 토마토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중국 하층민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두 주인공 중 하나는 토마토를 매만지며 뭔가 분노에 찬 모습으로 해법을 찾는 듯하고, 다른 하나는 이미 그 세계에 관심 없다는 듯 담담히 지나친다. 멀리서 발생한 폭발은 분노가 극에 달한 중국 민중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계층구조, 그 밑변을 이루는 최하층 노동자들은 이제 그 최하변을 견디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결국 계층구조의 틀 밖으로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돈을 향해 질주하는 마라톤 레이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채로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따뜻하게 자신들을 돌봐주지 않은 국가에 대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장커(賈樟柯) 감독의 2013년 영화 <천주정(天注定, A Touch Of Sin)>은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을 중국인들에게 직시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네 건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처럼 담백하게 중국 하층노동자들의 삶을 전한다. 

2013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서로 다른 네 개의 이야기는 인물의 동선과 함께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며, 이야기마다 인물의 상황을 상징하는 동물이 등장하며 영화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네 개의 스토리는 각각 독립적이지만, 자본으로부터 소외되고, 힘겨운 현실을 가까스로 견디며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적이기도 하다.

# 호랑이,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다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다 문제 해결의 길이 다 막히자 다하이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다 문제 해결의 길이 다 막히자 다하이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말을 채찍질하는 농민을 살해하는 다하이 채찍에 맞는 말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다하이는 말을 학대하는 농부를 살해한다.

▲ 말을 채찍질하는 농민을 살해하는 다하이 채찍에 맞는 말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다하이는 말을 학대하는 농부를 살해한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다하이는 산시(山西)성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마을의 탄광개발권을 성리(勝利)그룹에 넘기면서 마을에 지급하기로 한 배당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이에 촌장과 마을 회계에게 계속 문제를 제기하지만 답이 없다. 다하이는 베이징 중앙기율위원회에 이 사건을 신고하려고도 해 보지만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성리 사장에게도 이 문제를 다시 꺼내보지만 돌아오는 건 폭력뿐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다하이는 집에 있던 엽총으로 회계, 촌장, 사장을 차례대로 살해한다. 그리고 짐이 무거워 앞으로 가지 못하는 말을 채찍질하는 농부도 살해한다.

힘겹게 일하는 자신을 말로, 채찍질하는 농부를 부당한 권력으로 상정한 듯하다. 다하이가 살인을 결심하고 호랑이가 수놓아진 수건에 엽총을 감추고 나가는데, 마을 극장에서 <찰판관(鍘判官)>이라는 공연이 상연 중이다.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替天行道)"는 <수호전>의 호걸을 떠올리게 한다. 반부패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분노한 민중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패한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 트럭에 갇힌 소와 살인자

청부살인업자 싼얼 자신의 아들에게 멋진 불꽃놀이를 보여주겠다며 총을 쏘는 모습이다.

▲ 청부살인업자 싼얼 자신의 아들에게 멋진 불꽃놀이를 보여주겠다며 총을 쏘는 모습이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트럭에 갇힌 소와 그 뒤를 따르는 살인자 토대를 잃고 표류하는 살인자 싼얼의 존재는 중국사회의 커다란 불안요소이다.

▲ 트럭에 갇힌 소와 그 뒤를 따르는 살인자 토대를 잃고 표류하는 살인자 싼얼의 존재는 중국사회의 커다란 불안요소이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길에서 세 명을 살해한 싼얼은 어머니 칠순 잔치에 불쑥 나타난다. 노동자로 일하다가 청부살인업자가 된 싼얼은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착한 아들, 과묵하지만 책임감 있는 남편, 폼 나는 아빠, 역할을 다하는 동생이고자 한다. 칠순 잔치의 수익금과 남은 담배를 큰 형이 정확하게 삼형제 몫으로 나누는 장면은 가족 내에서조차 '1/n의 비정한 논리'가 지배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싼얼은 나눠 받은 세 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여 자신이 죽인 세 명의 명복을 빈다. "원망하려거든 하느님을 원망하고, 억울한 게 있으면 그분께 가서 말하라"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 또한 그 분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투다. 여기서 하느님은 다름 아닌 바로 중국사회일 것이다.

싼얼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는 부부를 살해하고, 그 돈가방을 챙겨 또 어디론가 잠적한다. 초원의 풀밭을 떠나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향해가는 소들처럼 싼얼은 고향을 떠나 중국 사회를 겉돌며 짐승 같은 살인행각으로 삶을 꾸려갈 것이고, 중국 사회는 그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선과 악의 두 얼굴, 뱀과 미녀

선과 악의 두 얼굴 샤오위 자신에게 닥치는 인연과 운명을 온 몸으로 겪어내는 샤오위의 모습이다.

▲ 선과 악의 두 얼굴 샤오위 자신에게 닥치는 인연과 운명을 온 몸으로 겪어내는 샤오위의 모습이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황사바람을 피하기 위해 스카프를 쓴 샤오위 힘든 현실의 역경을 묵묵히 딛고 걸어간다.

▲ 황사바람을 피하기 위해 스카프를 쓴 샤오위 힘든 현실의 역경을 묵묵히 딛고 걸어간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샤오위(小玉)는 사우나에서 종업원으로 일한다. 그리고 한 유부남을 사랑한다. 유부남은 함께 광저우로 떠나자고 하지만 샤오위는 부모님 때문에 떠날 수 없다. 기차를 타기 전 짐 검색에서 배낭에 칼이 있어 문제가 되자 샤오위는 그 칼을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한다.

사우나에 유부남의 아내가 찾아와 샤오위를 폭행한다. 샤오위가 몸을 피한 곳은 뱀으로 운명을 점치는 차량이다. "모든 인연과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영화의 제목 천주정(天注定)을 설파하던 곳이다. 샤오위가 일하는 사우나에는 성 매매 접대부들도 함께 일하는데, 손님 둘이 계속 샤오위에게 성 접대를 요구한다. 돈이 있는데 왜 성매매가 안 되냐고, 돈으로 너를 때려죽이겠다고 소리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돈으로 얼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던 샤오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사내를 살해하고 자수한다.

지신(地神)으로 추앙 받는 뱀은 성스러운 존재이면서, 성경에서처럼 유혹과 타락의 상징이기도 하다. 도덕적 가치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샤오위의 모습과 닮았다. 

# 작은 새 그리고 물 찾는 물고기들

작은 새 샤오후이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삶의 무게에 버겁다.

▲ 작은 새 샤오후이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삶의 무게에 버겁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샤오후이(小輝)는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돈을 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한 클럽에서 서빙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향인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샤오후이 QQ닉네임은 '작은 새'이고, 아가씨는 '물을 찾는 물고기'이다. 두 사람은 함께 물고기를 방생하며 애틋한 마음을 나누지만, 아가씨에게는 이미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성 접대까지 하는 모습을 목격한 샤오후이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간다.

샤오후이는 고향에서 엄마로부터 돈을 재촉하는 전화를 받고 괴로워하는데, 직장 동료들로부터도 집단 괴롭힘도 당한다. 숙소에서 돌아온 샤오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난간으로 뛰어가 투신자살한다. 아직 날갯짓을 배우지 못한 작은 새는 힘없이 추락해 죽음을 맞이한다. 중국에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 가족의 경제적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이런 작은 새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엔 수감생활을 마친 샤오위가 다시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입사하려는 회사는 다하이가 사장을 살해한 성리그룹이다. 황사 바람이 몰아치는 산시성 고성 옆 가설무대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영화는 이 멘트와 함께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을 클로즈업하며 끝이 난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你可知罪)"

죽음으로 점철된 이 영화는 힘없고 상처 받은 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죄, 한 번도 이들을 국가가 나서서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은 죄를 묻고 있는 듯하다. 생명의 가치, 인간의 존엄보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을 밝히는 세태에 대해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 열악한 노동환경 등의 문제를 방치하는, 허술하고 무책임한 국가시스템에 그 죄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죄를 아는지 모르는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은 중국정부는 이 영화를 상영금지 조치했다. 아직 그 죄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울려퍼지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대사가 민중의 얼굴과 오버랩되며 오랜 여운을 남긴다.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울려퍼지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대사가 민중의 얼굴과 오버랩되며 오랜 여운을 남긴다. ⓒ 상하이(上海)영화제작사



천주정 자장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