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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왕따 가해자였던 소년과 피해자였던 소녀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소년은 같은 반에 전학 온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머거리인 탓에 우물거리는 말투가 볼썽사나웠고, 필담용 노트를 갖고 다니며 반 아이들과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려는 태도도 답답했다. 무엇보다 싫은 건 공공연히 자신을 놀려대는 아이들 앞에서 내내 미소를 띤 채 "미안해"라거나 "고마워"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점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괴롭혔다. 귀에 대고 갑자기 큰 소리를 질러 놀라게 하고, 노트를 가로채 물 위에 던져버리고, 보청기를 빼앗아 망가뜨렸다. 소년은 작은 악마처럼 잔인하고도 집요했다. 결국 소녀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흔히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청춘 한 귀퉁이의 불편한 기억을 기어코 꺼내어 관객 앞에 내민다. 그 중심에 있는 건 둘 다 '쇼짱'이라고 불리는 소년 쇼야와 소녀 쇼코의 이야기다. 영화는 누구에게도 유쾌하지 않을 이들의 과거가 수년 후 고등학생이 된 두 사람의 재회를 통해 일으키는 감정의 파동을 다룬다. 쇼코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온 쇼야가 조금씩 그와 가까워지고,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들, 나아가 쇼쿄의 가족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영화의 큰 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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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와 피해자를 오가는 주인공 쇼야의 심리는 10대 특유의 천진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조명한다. 특히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그가 바로 그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는 전개는 의미심장하다. 공백으로 남은 중학교 시절을 거쳐 고등학생이 된 쇼야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귀를 막으며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지낸다. 과거 쇼코와 '친구가 되기를 거부한' 그가 이젠 반대로 자신의 마음을 응답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에 외톨이로 지내는 것이다.

이런 쇼야가 쇼코와 재회한 뒤 겪는 감정은 과거 자신의 악행에 대한 속죄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쇼코가 받았을 상처에 대한 뒤늦은 공감이기도 하다. 영화가 굳이 '긁어 부스럼'이 될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의 재회를 다루는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의미하다. 쇼야가 한 나쁜 말들이 쇼코의 필담 노트에 글로 기록되어 있듯, 그의 과거 행동들은 객관적 사실로 남아 쇼코가 당한 괴롭힘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렇게 영화는 어떤 사과에도 쇼코가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 쇼야가 지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쇼야가 쇼코를 찾아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모습들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성이자 성장통으로 비친다. 이는 과거 두 사람 곁에 있던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쇼야와 더불어 쇼코를 괴롭혔던 우에노, 이를 말리면서도 정작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가와이, 쇼코의 단짝이었지만 결국 그를 떠난 사하라 등은 쇼야로 인해 애써 외면했던 기억과 마주한다. 여기에 언니 걱정에 너무나도 빨리 철이 들어버린 쇼코의 동생 유즈루, 쇼야를 용서할 수 없는 쇼코의 엄마까지. 각자의 가슴에 사무친 오랜 앙금은 깊이 자리한 상처를 다시 헤집어낸 끝에야 비로소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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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목소리의 형태>가 이야기하는 건 타인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용기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런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마주보곤 "미안하다"고 말하는 용기이자, 악몽 같은 고통을 준 가해자에게 "아팠다"고 일갈하는 용기다. 푸르디푸른 하늘과 흩날리는 꽃잎, 잔잔한 강물의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건 바로 그 용기의 순간이다. 쇼야가 외면해 온 학교 아이들의 얼굴에 덮인 'X'자가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는 순간, 내내 건반을 둔탁하게 때리기만 하던 피아노가 전에 없이 밝고 활기찬 곡을 연주하는 순간. 2시간여 동안 아릿하게 이어지던 서사의 끝에 울려 퍼지는 청춘의 찬가는 꽤 오랜 울림으로 남는다. 9일 개봉.

목소리의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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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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