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 28년 만의 국내공연 기대에 걸맞은, 장엄한 규모와 스테파노 포다의 입체적 연출, 주연 미하엘 카자코프의 호연이 돋보였다.

국립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 28년 만의 국내공연 기대에 걸맞은, 장엄한 규모와 스테파노 포다의 입체적 연출, 주연 미하엘 카자코프의 호연이 돋보였다. ⓒ 문성식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김학민)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서울 서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지난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공연되었다

국내에서의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은 1989년 러시아 볼쇼이극장 내한 이후 28년 만이고, 국내 단체가 제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도 20세기 말 급변하는 러시아의 장대한 역사드라마를 그 어느 해외 현지보다도 규모 있고 멋지게 소개했다.

오페라 러시아 5인조 국민악파 무소르그스키는 특유의 민속적인 선율과 색채적인 관현악법으로 러시아의 '맥베스'라 불리는 푸시킨의 동명 원작 <보리스 고두노프>를 민족오페라 반열에 올려놓는다. 내용은 황태자를 살해하고 황제가 됐지만, 황태자의 망령에 시달리다 결국 죽게 되는 역사 속 인물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5년 국립오페라단 <안드레아 셰니에> 연출로 국내에 소개된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포다는 이번에 연출, 무대, 의상, 조명, 안무까지 도맡아 입체적인 아트디자인을 선사했다. 웅장한 러시아 크렘린 궁 내부와 황금색 벽면 가득 키릴문자, 천장의 거대한 종, 바닥의 시계 회전 무대, 번쩍이는 털 장식과 풍성한 의상, 역광과 하이라이트를 활용하는 조명 톤으로 거대한 역사에 직면한 민중과 군주, 성직자, 여성, 귀족 등 계층별 인물 심리를 음악 흐름에 맞추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마리나 역 양송미, 참칭자 드미트리 역 신상근 외 국내 가수들의 호연이 훌륭했다.

마리나 역 양송미, 참칭자 드미트리 역 신상근 외 국내 가수들의 호연이 훌륭했다. ⓒ 문성식


또한, 각 막별로 인물의 부각이 뚜렷한 극 특성 덕분에 동등한 급의 여섯 주·조역의 호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 첫날인 4월 20일 공연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역 바리톤 미하일 카자코프는 러시아오페라 전문가다운 면모로 프롤로그의 대관식에서 묵직함에 카랑카랑함까지 갖춘 저음의 카리스마로 좌중을 권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어잡았다. 대관식장면은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팡파르, 천장의 14개 종까지 매우 압도적인 위용이 있었다.

1막에서 베이스 이준석은 중후한 저음과 안정된 연기로 역사적 통찰과 안목을 가진 늙은 수도사 피멘을 잘 선보였으며, 테너 신상근은 가짜 드미트리로 변장해 정의를 심판하겠다는 젊은 수도사 그리고리 역을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펼쳐내었다. 여관장면은 무대를 위아래로 나눠 지하세계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베이스 김대영(바를람 역)은 '옛날에 카잔에서는'의 흥겨운 분위기를 선사했다. 메조소프라노 양계화(여관주인 역) 또한 붉은 의상에 부드럽고 명료한 음색과 연기로 '내 사랑 작은 오리'를 선보였다.

2막은 주황빛 뿌연 크렘린 궁, 테너 서필(슈이스키 역)은 맑고 탄탄한 음색으로 미하일 카자코프와 둘만의 장면에도 당당했다. 선왕의 아들 드미트리를 죽인 죄책감에 휩싸인 보리스가 부르는 '나는 최고의 권력을 쥐었다'와 드미트리의 환영을 보면서 '윽, 숨이 막힌다!(Uf, tyazhelo)'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거대한 시계 회전무대와 엄습해오는 공포를 표현하는 음악, 그리고 휘청대는 움직임과 탄식만으로도 심리를 표현하는 미하일 카자코프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3막 무대는 흰색무대와 여성합창의 분위기가 앞 1, 2막과 대비된다. 메조소프라노 알리사 콜로소바(마리나 역)는 부드럽고 안정된 음색과 야망이 드러나는 역할을 잘했다. 메조소프라노 양송미(마리나 역, 프레스 리허설, 21일 공연)또한 깊은 음색과 풍성한 성량을 선보였다. 베이스 박준혁은 중후하고 힘찬 음색으로 마리나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는 예수회 사제 란고니 역을 펼쳐냈다. 테너 신상근은 가짜 드미트리 역으로 고음의 팽팽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마리나에 유혹되어 황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잘 표현했다. 단 두 명뿐인 장면에서도 마리나와 드미트리는 무대가 꽉 찬 듯 집중력을 보여준다.

4막, 역동적인 오케스트라 반주 속 미하일, 바를람과 민중이 합창으로 보리스를 타도하고 드미트리를 왕좌에 앉히자고 한다. 검정 흰색 깃발의 라틴세력 폴란드 마리나와 드미트리가 장악한다. 멀리서부터 회전무대에 보리스와 일파들이 합창으로 흰 연기 속 회전 무대에 등장한다. 슈이스키와 대사제 피멘의 간청이 큰 비중으로 이어지고,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던 보리스는 종소리와 장송합창이 울리자 '기다려라! 난 아직 황제다!'를 외치며 거대한 회전 시계 속에서 숨을 거둔다.

 바를람 역 김대영의 '옛날에 카잔에서는' 노래가 흥겹다.

바를람 역 김대영의 '옛날에 카잔에서는' 노래가 흥겹다. ⓒ 문성식


현재 대선과도 맞물리는 공감에도, 서사의 흐름상 큰 브라보를 못 외치던 관객들은 커튼콜 때, 모든 배역과 무용단, 연출, 지휘자, 스태프 등장마다 열렬히 브라보로 화답했다. 러시아 지휘자 스타니슬라브 코차놉스키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러시아적 억양과 뉘앙스를 잘 부각시켜줬으며, 스칼라오페라합창단과 무용수들과 '아트컴퍼니 연애' 연기자들 또한 극의 볼륨감과 입체감의 공신들이었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10일, 12일, 14일에 <오를란도 핀토 파쵸>를, 6월 3일부터 4일까지 <진주조개잡이>를 공연한다. 두 작품 모두 2015-2016 시즌 레퍼토리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이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플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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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과 사운드아트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대학강의 및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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