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테이블>은 2016년 <최악의 하루>를 만들었던 김종관 감독의 장편 영화다. 영화는 한 카페에 머물다 가는 네 쌍의 대화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이다. 첫 번째 커플은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남녀다. 여자(정유미 분)는 유명 영화배우가 되었고,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여자는 그들이 나누었던 추억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만 남자는 여자의 변화에 대해 쉴 새 없이 캐묻고 지적한다. 성형 수술을 했는지, 떠돌고 있는 소문은 진짜인지. 게다가 남자는 여자를 자랑하기 위해 동료들까지 끌고 와서 그들의 만남을 엿보게 한다. 여자는 변화에 집착하는 남자에게 실망하고 이내 자리를 떠난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김종관 감독


두 번째 커플의 남자는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상태다. 여자 정은채 분)는 여행이 어땠는지가 아닌, '왜' 여행을 갔어야만 했는지, '왜' 금방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심드렁하게 묻는다. 우리는 곧 이들이 처음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오랜 시간 후에 재회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의 대화 역시 위태롭다. 끊어질 듯, 깨어질 듯. 그러나 갑자기 남자는 여행을 다니며 여자를 위해 곳곳에서 모은 기념품들과 선물을 하나씩 테이블에 늘어놓기 시작하고, 여자의 얼굴엔 기적 같은 미소가 흐른다.

세 번째 커플은 젊은 여자(한예리 분)와 중년의 여자다. 이들은 사기 결혼으로 돈을 버는 전문 사기꾼들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 진짜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중년의 여자에게 자신의 엄마가 되어주기를 의뢰한다. 사기를 모의하듯, 담담히 의상과 프로필 들을 설정하지만, 이들의 대화에는 희미한 설렘과 희망이 묻어난다. 중년의 여자는 본인의 딸을, 젊은 여자는 엄마를, 각자의 '대타' 를 통해 그리워한다.

네 번째 커플은 예전의 연인이었던 남녀다. 여자(임수정 분)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날 잡으면 결혼 안 하겠다"라며 다시 만날 것을 회유한다. 이를 거절한 남자에게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내자고 매달린다. 여자가 남자의 의중을 물어볼 때마다 남자의 눈과 손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의 눈과 손이 흔들릴 때마다 여자는 설렌다. 그러나 결국 남자는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둘은 다시 헤어진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김종관 감독


<더 테이블>의 스펙터클은 인물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만들어낸다.  러닝 타임 72분의 대부분이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할애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를 가장 예쁘게 찍는다"는 수식어를 가진 김종관 감독의 작품답게 각 에피소드 안의 인물은 화면의 프레임에서 한 폭의 인물화처럼 맑고 심오하다. 특히 정면 클로즈업이 아닌, 프로필 (옆 모습) 쇼트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쇼트들의 클로즈업들이 많은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인물이 상대방의 말에 반응하는 모습을 조밀하게 엿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내러티브의 발전은 오롯이 인물들의 대사로만 이루어진다. 목소리의 톤과 떨림이 이 영화가 사용하는 유일한 특수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이 무언가를 서술하면 그것이 영화의 스토리가 되고 감정의 기폭제가 된다. 가령,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자는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프랑스는 어땠는지, 인도는 어땠는지. 남자는 흥분하여 장소들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카메라는 앞에 앉은 여자의 표정을 비춘다. 관객은 남자가 묘사하는 장소를 그려봄과 동시에, 앞에 앉은 그녀의 못마땅한 표정을 읽게 된다. 그녀는 이 멋진 여행지들을 위해 남자가 자기를 떠난 것이 아직도 분한 것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것은, 인물의 움직임이나 동선이 크지 않기 때문에 영화 안에서의 결정적 소품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음료(혹은 음식) 등은 각 인물, 혹은 그들이 나누고 있는 케미스트리를 반영하는 듯하다. 가령, 여자의 유명세에만 집착했던 남자는 맥주를 마신다. 그녀가 갖게 된 직업의 이면에 존재하는 허상과 허영이 좋은 남자는, 각성제인 커피보다 과잉과 거짓을 풍미하는 알코올이 적격이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영화 <더 테이블> 스틸사진ⓒ 김종관 감독


두 번째 커플의 여자, 푸드 잡지 기자는 남자의 장난스러운 요청에 의해 테이블 앞에 놓인 초콜릿 케익을 '맛깔나게' 서술한다. 초콜릿 케이크는 여자가 읊조리는 멋진 산문의 주제가 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케이크를 입에 대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너무나도 멋지게 설명했던 케이크를 손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커플은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 자리를 떠난다. 여자가 헌정했던 주옥같은 단어들과 남자의 애정 어린 눈빛을 머금은 케이크는 이 에피소드의 장대한 클로즈업의 주인공이 된다.

임수정이 연기했던 마지막 커플의 여자는 홍차를 마신다. 여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그와 보냈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고인 물' 을 탈출한 여자지만 그럼에도 과거 사랑의 애틋함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티백에서 오래도록 알싸한 향을 뿜어내는 홍차는 그녀의 미련을, 미쳐 쓸려 가지 못한 애정을 닮았다.

좋은 영화는 매체를 초월한다. 하나의 악장이 되었다가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더 테이블>은 영화라는 외피를 쓰고 순수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단조롭고 차분하지만, 설레면서 즐거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 현재 5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보석 같은 영화를 많은 이들이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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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전복을 꿈꾸는 영화연구자 입니다.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영화사 , 이론 등을 강의했고 현재는 영화사와 검열, 문화 정책에 관한 책을 집필 중입니다. 저서 및 연구: 박정희 정권 영화 검열 연구, 호스티스 영화 연구 등 hjkanj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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