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는 고전과 관련한 멋진 대화가 등장한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책을 많이 읽고, 그중에서도 같은 고전을 반복해 읽기를 즐기는 주인공 와타나베가 같은 기숙사에 사는 나가사와 선배와 친분을 쌓게 되는 장면에서다. 와타나베와 마찬가지로 고전 읽기를 즐기던 나가사와가 와타나베에게 책에 관해 물어오면서 둘은 말을 트게 되는데, 왜 고전을 읽느냐는 와타나베의 질문에 나가사와는 아래와 같은 답을 내놨더랬다.

"현대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는 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중략) 그래서 (고전을) 읽는 거야. 남과 같은 것만 읽다 보면 비슷비슷한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돼."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나가사와 선배의 이 말은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떠나가지 않았다. 실제로 이 문장을 읽은 뒤 소설과 사회과학 서적을 막론하고 고전을 더 많이 읽게 됐으니 그의 말이, 하루키의 이야기가 내게 미친 영향이 절대 적지 않을 것이다.

오래 두고 생각해도 나가사와의 말은 참으로 현명하다. 현대문학이며 현대 작가를 신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시간의 냉엄한 심판을 가로질러 살아남은 작품엔 예사롭게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더욱이 고전이 지닌 명성에 비해 실제 고전을 읽는 독자가 많지 않으니 고전을 읽는 사람은 남과 다른 문화적 자양분을 쌓을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어디 문학이며 책뿐이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상매체의 특성상 소설보다 빨리 낡아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지만 몇몇 작품은 시간의 세례에도 퇴색되지 않는 보기 드문 장점을 오랫동안 지켜내 왔다. 그와 같은 작품은 관객의 머리와 마음에 특별한 파동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삶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개봉한 지 수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까지 지난 재개봉 영화가 관객들의 선택을 받는 이유다.

2012년 한 해 동안 8편 개봉한 재개봉작은 2015년부터 한 해 100편을 넘어설 만큼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그 가운데 몇은 개봉 당시 성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고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만 해도 각 3만 명 내외의 관객을 동원한 <반지의 제왕>시리즈 3편으로 포문을 연 재개봉영화는 4월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클로저>가 모두 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모으며 재개봉영화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매달 적게는 5편에서 많게는 십수 편까지 개봉하는 재개봉영화 열풍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푸른 달 재개봉작 가운데 눈에 띄는 작품으론 어떤 영화가 있을까? 일찌감치 재개봉을 확정 지은 영화 두 편을 아래 소개한다.

[하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재개봉 포스터. CGV에서 3일부터 만날 수 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재개봉 포스터. CGV에서 3일부터 만날 수 있다. ⓒ (주)퍼스트런


최순실의 벗겨진 프라다 구두 한 짝 때문일까? 2006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11년 만에 한국 영화관에 내걸린다.

영화는 뉴욕 패션계를 배경으로 한 것부터 <섹스 앤 더 시티>를 연출한 데이빗 프랭클이 감독을 맡은 것까지, 당대 최고의 인기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성공을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의도 아래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성장드라마에 뉴욕 패션계의 화려함을 덧씌워 보는 이의 오감을 충족시켰고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안정된 연기 덕택에 이런 부류의 영화에선 찾아보기 흔치 않은 깊이까지 손에 넣으며 2006년 가장 사랑받은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자리매김했다. 특별히 주연배우 앤 해서웨이는 이 영화를 통해 전 세계적인 명성을 손에 넣었다.

메릴 스트립의 기용 역시 성공의 요인으로 꼽힌다. 그녀가 맡은 편집장의 캐릭터는 그간 관객들에게 친근해진 이미지를 한순간에 뒤엎을 만큼 파격적이었으나 노련한 배우답게 조금의 억지스러움도 느껴지지 않게 역할을 소화해냈다. 이 작품 이후 메릴 스트립의 편집장 캐릭터를 패러디한 수많은 2차 창작물이 등장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튼실한 구성과 짜임새 있는 전개에 더해 시시각각 등장하는 현란한 소품도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다. 여기에 더해 주인공인 앤디의 직장생활과 사생활 사이를 오가며 그녀의 고민을 관객들로 하여금 절절하게 느끼도록 하는 아기자기한 구성은 그 방식에 있어서 데이빗 프랭클의 장기로 꼽히는 시트콤의 축소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가벼우면서도 재미있고 나름의 감동과 교훈까지 찾을 수 있는 작품으로 오락영화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고루 갖춘 영화임이 분명하다. 평론가보다는 팬들에게 사랑받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재개봉에서도 흥행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는 3일 재개봉한다.

[둘] <8 마일>

 영화 <8 마일> 재개봉 포스터.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오는 9일 관객 앞에 나선다.

영화 <8 마일> 재개봉 포스터.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오는 9일 관객 앞에 나선다. ⓒ UPI 코리아


당대 최고의 힙합 가수 에미넴의 자전적인 영화로 2003년 개봉 당시 전 세계적인 충격을 던진 <8 마일>이 오는 오는 9일 재개봉한다. 실제로 에미넴이 어린 시절을 보낸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백인인 그가 흑인음악인 힙합 가수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극적으로 담아냈다. 이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힙합 가수로 활동하고 있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영화가 던진 감동만큼은 퇴색되지 않고 그 시절 그대로다.

영화의 제작은 힙합 문화에 매료된 제작자 브라이언 그레이저와 감독 커티스 핸슨이 대략적인 얼개를 잡은 뒤 주인공인 지미 역을 연기할 배우를 물색하며 시작됐다. 최우선적인 후보로 꼽힌 에미넴이 출연을 확정 짓자 준비부터 촬영, 편집까지의 과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 음악은 에미넴이 직접 자신의 곡을 들고 출연하며 완비됐고 가수였던 에미넴을 배우로 탈바꿈시키는 훈련과정도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커티스 핸슨은 <요람을 흔드는 손> <LA 컨피덴셜>에 이어 자신의 대표작으로 남을 <8 마일>을 힘이 넘치는 강렬한 영화로 완성했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2000년대 초반 미국 젊은이들의 좌절과 열망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순한 성장드라마를 넘어 미국이 처해 있던, 여전히 처해 있는 현실을 적절히 반영해 관객은 물론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끌어냈다.

에미넴 외에도 지미의 어머니 역을 맡은 킴 베이싱어와 여자친구 역의 브리트니 머피, 라이벌 역의 안소니 마키 모두 열정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특히 2009년 자택에서 요절한 브리트니 머피도 이 영화를 각별히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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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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