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건 단순히 귀가 멀고 눈이 침침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말을 못 알아듣고 그들이 즐거워하는 걸 봐도 즐거운 걸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영화 <길>의 한장면

영화 <길>의 한장면 ⓒ 더블앤조이 픽쳐스


인생의 내리막길 끝자락에 선 노인에게도 한때는 청춘이 있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긴 그 눈부신 시절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생생하다. 우정을 나눈 친구와 다정했던 자매, 가슴 설레던 풋사랑 상대는 이제 없지만 당시의 감정만큼은 거짓말처럼 불쑥불쑥 되살아난다.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월의 풍파를 겪었어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하는 밥 한 끼에 속절없이 마음이 데워진다. 노인은 그렇게 청춘을 간직한다. 아니, 언제까지나 청춘을 살아간다.

영화 <길>은 60여 년 전 청춘을 함께했던 순애와 상범, 수미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속 세 사람은 지난한 세월을 뛰어넘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식과 손자들을 멀리 떠나보낸 채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는 순애, 손녀와 단둘이 살며 이제 막 빵집을 개업한 상범, 그리고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진 수미까지. 영화는 세 노인 각자의 에피소드들을 덤덤하게 나열하며 그들 내면의 미세한 진동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영화 <길>의 한장면

영화 <길>의 한장면 ⓒ 더블앤조이 픽쳐스


첫 챕터 '순애의 하루는 바쁘다'는 노인의 고독을 천진하면서도 씁쓸하게 그린다. '사람'이 그리운 순애(김혜자 분)가 집에 들이는 사람이라곤 고작 가전제품 AS 기사 정도다. 그래서 그는 인터넷에서 '가전제품 고장내는 법'을 검색한다. 냉장고며 세탁기며 TV까지 온갖 가전제품들을 고장낸 뒤 AS 센터에 전화를 건다. 약속 시간에 맞춰 방문한 AS 기사 청년에게 정성 가득한 식사를 대접하고, 그걸로 모자라 디저트에 커피까지 건네는 게 그의 낙이자 일상이다. 우아한 민소매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장까지 고쳐가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순애는 넉넉하지 않은 처지에도 굳이 쌈짓돈을 쥐어주는 시골집 할머니와도 다르지 않다.

 영화 <길>의 한장면

영화 <길>의 한장면 ⓒ 더블앤조이 픽쳐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상범의 첫사랑'은 풋풋한 사춘기 감성에 젖은 노인의 이야기다. 빵집을 개업하는 상범(송재호 분)은 코디네이터 혜진(지안 분)으로부터 2주간 일대일 파티셰 수업을 받는다. 그는 스스럼없이 친절한 혜진에게 호감을 느끼고, 매일 아침 8시마다 혜진을 기다렸다가 따뜻한 커피를 건넨다. 상범이 혜진을 통해 60년 전 첫사랑 순애에 대한 감정을 되새기는 전개, 그리고 보청기가 고장난 탓에 혜진의 목소리가 멀게 들려오는 장면은 두 시간의 커다란 간극 속에서 더욱 아련하게 다가온다.

 영화 <길>의 한장면

영화 <길>의 한장면 ⓒ 더블앤조이 픽쳐스


마지막 에피소드 '길 위의 수미'는 모든 걸 잃은 노인의 상실감을 조명한다. 아들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수미(허진 분)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떠난 여행을 통해서다. 수미는 우연히 찾게 된 한 주점에서 실의에 빠진 두 청년을 만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상처도 위로받는다. 헤어날 곳 없는 막다른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이들의 처지는 '되돌길'이란 지명과 맞닿으며 아릿하게 폐부를 찌른다.

세 단편이 그리는 노년의 지리멸렬함 속에서 나름의 위로를 건네는 건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거다. 세 주인공의 '길'들이 겹쳐진 그 짧았던 시절이야말로 현재 이런저런 결핍을 겪는 이들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늙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필요 없어지는 게 무서운 것"이라고 되뇌는 순애 뒤로, 풋풋하고 당찼던 어린 순애의 모습은 그렇게 '플래시백'으로 반짝이며 영화의 한줄기 빛이 된다. 오는 5월 11일 개봉.

김혜자 송재호 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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