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 배달하러 가는 길

우편 배달하러 가는 길 ⓒ 영화사 진진


세계적인 시인과 우편배달부가 만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한 인물이 그 어떤 인물도 만나지 않고 끝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 사람만 달랑 나와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영화가 있던가. 많은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것 중에는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처럼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 같다. (기억이 맞다면) 이 소설에서 화자는 말 그대로 지하에서 혼자 독백만 한다.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홀로 걸었던 실화를 기록한 <와일드>에서조차 주인공은 사람들을 만난다. 영화에선 늘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거나 헤어진다. 관계를 이어나가거나 헤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가끔은 꽤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와의 만남을 잊지 못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처럼.

<일 포스티노>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만남이 한쪽에게 큰 변화를 불러온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가가 딱 죽기 진전의 마리오에게 다가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인가요?"하고 묻는다면 마리오는 필시 "아, 당연히 파블로 네루다 씨죠! 제가 그분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를 기억이나 하실까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 포스티노>는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프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두 인물의 성격이나 그들이 주고받은 재치 있는 대화 등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의 비중 등은 다르다. 소설은 칠레가 배경이지만 영화는 이탈리아가 배경이고, 소설은 시인이자 공산주의자로서의 네루다의 모습이 깊이 있게 드러났지만, 영화에서 네루다의 삶은 배경으로 그려지고 두 인물의 만남에 더 집중한다.

 수영하러 해변을 찾은 네루다를 붙잡고 시를 이야기하는 마리오

수영하러 해변을 찾은 네루다를 붙잡고 시를 이야기하는 마리오 ⓒ 영화사 진진


시를 알려면 은유를 알아야지!

이탈리아의 작은 섬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은 시인 네루다는 망명길에 오른다. 뉴스에서 접한 네루다에 대한 마리오의 인상은 여인들에게 사랑 듬뿍 받는 낭만적인 시인. 어부가 영 체질에 안 맞는 마리오는 감기 핑계를 대며 일을 안 하고 있던 참에 우편배달부 공고를 본다. 마리오가 배달하는 우편물의 수취인은 단 한 명, 파블로 네루다. 영화는 마리오가 네루다의 우편을 배달해주며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린다.

언젠가부터 둘 사이를 이어주는 건 시였다. 네루다의 시를 읽으며 본인도 시인이 되고 싶은 열정에 휩싸인 마리오는 슬쩍 네루다가 쓴 시구를 인용하며 네루다를 떠본다. 그런 마리오를 귀엽게 본 네루다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말해준다.

"은유가 뭔데요?"
"뭔가를 말하기 위해 다른 것에 비유를 하는 거야."
"예를 들면?"
"하늘이 운다가 무슨 뜻이지?"
"비가 온다요?"
"그렇지, 그게 바로 은유야."

마리오의 삶에 은유가 들어왔다. 파도치는 바다, 보라색 양파, 평범한 일상, 아름다운 여인. 이 모든 게 은유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마리오는 배달할 우편이 없어도 네루다를 찾아가고, 이 세계적인 시인은 그런 마리오를 별 내색 없이 기꺼이 반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에 빠지게 된 마리오.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시로 얻을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거대한 은유를 은유의 말로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아직 시도, 은유도 서툰 마리오는 네루다를 아이처럼 조른다. 시 한 편만 써주세요. 베아트리체를 위해서. 내 사랑을 위해서.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이 쌓여간다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이 쌓여간다 ⓒ 영화사 진진


영화가 그리고자 한 것은 분명 시이고 사랑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와 사랑을 이룬 시점에서 끝이 나지 않은 건 영화가 더 크게 그리고자 한 것이 남아있어서다.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우정, 그리고 이 우정이 뒤바꿔놓은 마리오의 삶. 말주변도 없고 딱히 신념이랄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보면 비루한 삶을 살던 마리오는 시를 통해 자신이 보는 세상과 그 세상을 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뜬다. 마리오가 용기를 내 시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녹음기에 담는 건 그가 삶의 방향을 찾았다는 뜻이다. 네루다는 칠레로 돌아갔지만 네루다가 남기고 간 것은 여전히 마리오 곁에 남아 있다. 시와 은유 그리고 사랑이.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일 포스티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