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 캐릭터들의 주 임무는 사랑에 빠지는 일. 때문에 이들의 직업이 재벌이든, 회사원이든, 변호사든, 의사든,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작가들 로망·소신·반성 담긴 '작가 캐릭터'

 작가들의 정체성이 담긴 드라마 속 작가 캐릭터들

작가들의 정체성이 담긴 드라마 속 작가 캐릭터들 ⓒ MBC, SBS


하지만 그 직업이 '작가'라면 조금 다르다. "드라마는 99% 상투에 1%의 신선함만 있으면 된다",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이 멋있어야해"하고 외치던 <온에어> 서영은(송윤아 분)의 대사에는 스타 드라마작가 김은숙의 작가적 소신이 담겨있었고,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먹히고 말았던 <W> 오성무(김의성 분)는 자기가 만든 캐릭터들을 궁지로 몰아 스토리를 이어나가야만 했던 송재정 작가의 죄책감과 반성, 고민이 담긴 설정이었다. 작가들은 자기도 모르게, 혹은 의도 하에 드라마 속 작가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작가의 애정이 담길 수밖에 없고, 그만큼 캐릭터의 고민도, 개연성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촘촘하게 설정된다.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오로라 공주>에 이어 은퇴작 <압구정 백야>까지, 임성한 작가의 거의 모든 히트작에는 작가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주변의 사랑과 선망을 한몸에 받고, 주변 인물들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찬사와 감탄을 쏟아낸다. '임성한 월드'에서 '작가'는 지성과 학식, 재력까지 갖춘 최고 엘리트.

그 시작은 <인어아가씨>의 은아리영(장서희 분)이었다. 임 작가는 아리영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안달 난 수아(고두심 분)를 통해 '스타 작가'라는 직업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아리영의 "피고름으로 쓴 대본"이라는 대사로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기도 했다. 임 작가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이 대사는, 방송된 지 15년이 지나도록, 드라마 작가들의 고충을 표현하는 데 빠짐없이 소환되고 있다.

<킬미 힐미> 진수완 작가가 만든 작가 캐릭터는? 

 <시카고 타자기> 속 현재의 스타 작가 한세주(위)와 1930년대 문인 서휘영(아래).

<시카고 타자기> 속 현재의 스타 작가 한세주(위)와 1930년대 문인 서휘영(아래). ⓒ tvN


<킬미 힐미> <경성스캔들> <해를 품은 달> 등을 쓴 진수완 작가는 뻔하고 유치해 보이는 설정에서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탁월하다. 특히 7개의 다중인격을 가진 <킬미 힐미> 의 재벌 3세 차도현(지성 분)을 통해 아동 학대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던 것처럼 말이다. 극 초반 오그라들게만 느껴졌던 신세기(차도현의 인격 중 하나)의 "기억해. 오후 10시. 내가 너에게 반한 시간"이라는 대사, '오리진'이라는 극 중 황정음의 이름과 차도현의 여러 인격드리 준 반전과 울림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진수완 작가가 쓴 <시카고 타자기> 속 작가 캐릭터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카고 타자기> 한세주(유아인 분)는 스타 작가다.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진 대저택에 살며, 넓은 마당에는 애완용 사슴을 키우고, 광팬과 파파라치까지 있다. 신작 출판에 전세계가 들썩일 정도의 인기를 누리는 그의 설정을 조앤 롤링이나 스티븐 킹 정도로 이해하면 얼추 맞지 싶다. 잘난 만큼 잘난 척도 싶하고, 까탈스럽다.

소설 '수상한 식모들'을 쓴 박진규 작가는 <엔터미디어>에 쓴 '현실 소설가 입장에서 본 '시카고' 유아인 캐릭터의 함정'이라는 글을 통해 "신에 가까운 집중력과 창조력으로 쓰고 또 쓰는" 한세주의 현실성을 지적했다. 그는 괴팍하고 까탈스러운 한세주의 성격을 두고도 "기나긴 시간 동안 통용되어온 얄팍한 예술가의 신화에 기대 유령처럼 만들어진 인물"이라면서 "대중들 머릿속에 익히 그려진, 잘나가지만 괴짜인 예술가의 틀에 맞는 캐릭터"라고 지적했다. 극 중 라이벌인 소설가 백태민(곽시양 분)에게 "미용실 들락거릴 시간에 나처럼 글 써. 미친 듯이"라는 조언을 두고 "현실에 미친 듯이 글을 쓰는 소설가는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세주가 누리고 있는 아이돌급 인기와 엄청난 부를 거세하고, '소설가 한세주'를 '드라마 작가'로 두면 조금 이해가 된다. 이동 시간까지 아껴가며 글을 쏟아내는 한세주의 모습은 매주 120분 분량의 대본을 쏟아내기 위해 잠에 쫓겨야 하는 드라마 작가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대본이 모두 나오기 전부터 제작과 방영이 시작되는 우리 드라마 제작 현실에서, 드라마 작가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글을 쓴다. 대본 출고 속도가 드라마 방영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쪽대본'이 난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쓰는 사람의 고뇌 

 모든 것이 갖춰진 스타 작가 한세주의 작업실.

모든 것이 갖춰진 스타 작가 한세주의 작업실. ⓒ tvN


극 중 한세주는 자신의 소설을 따라 모방 범죄를 저지른 스토커가 자신을 향한 원망과 억울함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자 슬럼프에 빠진다. 이때 환상처럼 떠오른 전생의 기억에서 유수영(임수정 분, 전설의 전생)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럼 타자기는 총보다 강한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글이 정말 총칼이 되어 사람을 죽였다는 무게에 눌리자, 한세주는 더이상 대중을 향해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위대한 글 쓰세요. 여자 꼬시고 부귀영화 꿈꾸는 그런 글 말고." 

1930년대 일제강점기 블랙리스트에 오른 천재작가 서휘영(한세주의 전생)은 삼류 연애 소설을 쓰며 산다. "조국은 빼앗겼지만, 내게서 문장을 빼앗을 수는 없다"며, "자유가 찾아오면 평생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싶다"는 서휘영의 자조와 "위대한 글을 쓰라"는 유수영의 주문은 의미심장하다. 한세주가 느끼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뇌에는 진수완 작가의 고민도 담겨있을 것이다.

 "해방된 조국에는 블랙리스트 같은 거 없겠지?"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진오(고경표 분)와 서휘영(유아인 분).

"해방된 조국에는 블랙리스트 같은 거 없겠지?"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진오(고경표 분)와 서휘영(유아인 분). ⓒ tvN


"해방된 조선에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미친듯이 쓸거야."
"해방된 조선에는 블랙리스트 같은 거 없겠지?" 
"없으니까 해방이지." 

불과 20년 뒤에 살고 있는 박해영(이제훈 분)에게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있으면 무슨 개망나짓을 해도 잘 먹고 잘살아요? 20년이나 지났으면 뭐라도 달라졌겠죠?"라고 울분에 차 외치던 이재한(조진웅 분)의 질문은 한결 더 머쓱해졌다. 1930년에서 무려 90여 년이 지난 해방된 이 땅에, 여전히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고 있을 과거의 서휘영과 이재한. 그들에게 진실을 답해줄 수 없어 머쓱한 2017년의 우리. 진수완 작가가 <시카고 타자기> 속 작가 캐릭터를 통해 하고 싶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극 중 한세주는 무명 시절에도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글을 쓰겠다"고 당차게 외쳤다. 시청률 1%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진수완 작가가 이 안에 담아낼 '누구도 모방할 수 없을 이야기'에 기대를 놓아버리기엔 아직 조금 이르지 않을까?

시카고 타자기 유아인 한세주 진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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