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이 고향인 콜롬비아에서 발레 연습을 하는 모습.

조안이 고향인 콜롬비아에서 발레 연습을 하는 모습. ⓒ (주)루믹스미디어


2000년에 개봉한 <빌리 엘리어트>는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는 최고의 성장 영화다. 영국 북부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는 우연히 발레를 접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다. 서툰 몸짓으로 선배 아이들을 따라 하며 발레 열정을 불태우는 빌리의 최대 난관은 발레에 대한 선입견. 남자가 하는 운동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어른들 몰래 윌킨슨 부인의 지도를 받는 빌리의 꿈은 로열 발레 스쿨에 입학하는 것이다.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오디션 장면이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발레를 좋아하게 된 빌리에게 심사위원이 묻는다. "빌리,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 드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을 받고 당황한 빌리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해 심사위원들을 실망하게 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감정을 가장 순수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표현한다. "춤을 추면 모든 걸 잊어버려요. 다 사라져요.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어요.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요." (이때 제이미 벨의 연기란!)

10대 아이들의 프로 발레 댄서 되는 길

 아란과 가야의 세미 파이널 참가 모습.

아란과 가야의 세미 파이널 참가 모습. ⓒ (주)루믹스미디어


<빌리 엘리어트>의 다큐멘터리 버전이라고도 하는 <퍼스트 포지션>에서 발레 신동 아란도 빌리가 그랬던 것처럼 왜 발레가 좋은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발레가 좋아요. 설명하기 힘드네요."

설명하긴 힘들지만, 몸은 너무 아프지만, 연습할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아란은 지금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 중이다. 다큐멘터리는 아란 포함 여섯 명의 아이들이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세미 파이널을 통과해 파이널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실력은 영화 속 빌리보다 훨씬 뛰어나다. 굳이 더 비교하자면 영화를 각색한 뮤지컬 속 빌리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다. 다큐멘터리 속 아이들의 삶은 실전이기 때문. 발레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심사위원들의 눈에 띌 수 없기에 아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체형의 아름다움과, 기술의 능숙도, 그리고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프로 발레 댄서의 길. 하지만 여섯 아이의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

이번이 마지막 오디션이 될 17세의 레베카는 별명인 '바비인형'답게 외모도 예쁘고, 몸매도 근사하며, 기술도 좋고, 재정적 지원도 큰 문제 없다. 하지만 단지 이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프로 댄서가 되는 건 아니다. 세미 파이널 무대에서 실수한 레베카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며 "노력은 중요하지 않아요"라고까지 말한다. 전쟁지역 시에라리온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미카엘라는 흑인이다. 흑인과 발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이겨내며 정통 발레 댄서를 꿈꾸고 있다. 발레를 향한 열정은 아킬레스건 염증까지 잊게 할 정도다.

콜롬비아에서 온 조안의 목표는 이번 대회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 가난한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조안의 성공은 곧 가족의 성공이 된다. 10대 초반인 아란과 가야, 미카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포기했다. 파티는 고사하고 친구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미카는 공부 시간을 줄이고 연습 시간을 늘리기 위해 홈스쿨링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두의 상황은 다르지만, 목표 하나는 같다. 이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발레 대회이다. 발레를 하는 모든 아이의 일차 목표는 이 대회에서 수상하거나 장학금을 받고 세계 유수의 발레단과 발레스쿨에 들어가는 것이다. 발레를 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아이들이 들어갈 곳은 적기에 그만큼 이 대회의 의미는 크다. 경쟁이 치열하기에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완벽주의자가 되어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운동선수만큼 부상도 잦지만 다쳤다고 쉴 수도 없다. 그만큼 경력에 큰 타격이 오기 때문.

발레에 인생을 건 아이들

 세미 파이널을 통과한 줄스는 결국 파이널 대회는 포기한다. 줄스가 다리를 찢고 있는 모습.

세미 파이널을 통과한 줄스는 결국 파이널 대회는 포기한다. 줄스가 다리를 찢고 있는 모습. ⓒ (주)루믹스미디어


십 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의 표정이 어른스럽고 단단한 건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12살인 미카는 "제 또래 아이들 대부분은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전 평생 발레를 하고 싶다고 결정했어요"라고 말한다. 평생 발레를 하고 싶다고 결정했으니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떠안아야 한다는 걸 안다. 발레를 하는 대부분의 아이는 17세가 되면 우리가 직장을 구하듯 일할 곳을 찾아야 한다. 찾았다고 해도 조안의 아버지 말처럼 대부분의 발레 댄서는 35세가 되면 은퇴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다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조안과 레베카가 더 불안해 보이는 이유이다.

세미 파이널을 지나 파이널로 진입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나는 이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도 다른 아이들 또한 모두 꿈을 이루길 바란다는 인지 부조화를 겪으면서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수능을 보는 모든 아이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처럼.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결과가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카메라는 아이들의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 아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춰주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찬사를 보냈다. 아이들이 지나온 열정의 시간을 격려하며.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 임팩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가능성만으로 로열 발레 스쿨에 입학한 빌리가 로열 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되어 새처럼 날아오르는 모습. <퍼스트 포지션>은 영화에서 생략한 십수 년의 시간 어디쯤 놓여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다면 춤을 출 땐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낀다던 빌리가 진짜 새처럼 날기 위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퍼스트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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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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