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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제니(아델 에넬 분)는 건강 문제로 휴직 중인 원장 대신 3개월째 동네 병원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인턴 줄리앙(올리비에 본나우드 분)과 함께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어느 날 저녁 진료 마감시간 이후 병원 벨을 누르는 한 환자를 외면한다. 다음날 병원 근처에서 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제니는 CCTV를 통해 병원을 찾은 환자가 바로 그 소녀였단 사실을 알게 된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은 사건 경위와 소녀의 신원 파악에 나서지만 여의치 않다. 그리고 죄책감에 휩싸인 제니는 죽은 소녀의 이름과 가족을 찾아 주위를 수소문한다.

영화 <언노운 걸>은 한 '타인'의 죽음으로 불거지는 여러 감정들을 남다른 결로 포착한다. 주인공 제니를 통해 이름없는 소녀의 죽음을 수면 위에 올리고, 그 사건에 얽힌 가느다란 실 몇 가닥을 붙잡은 채 깊은 심연 속 진실을 향한다. 이 와중에 하나하나 드러나는 건 소녀의 죽음을 조장하고 방관한 이들, 나아가 진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개인들의 단면이다. 그렇게 영화는 한 여자의 죄책감으로 불거진 감정의 파동을 책임과 사명감, 나아가 양심으로까지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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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의사였던 제니가 소녀의 죽음 이후 홀로 사건을 파헤치는 전개는 잔잔하면서도 지속적인 울림으로 영화의 큰 줄기를 형성한다. 제니는 병원과 환자의 집을 오가며 사람들을 진료하면서도, 한편으론 만나는 사람마다 죽은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의 신원을 밝히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무표정하면서도 능숙한 의사로서 제니의 모습은 '탐정'으로서 그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각각 환자와 죽은 소녀에 대한 제니의 감정은 대단한 선의라기보다 직업정신이나 부채의식에 가깝게 느껴진다.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제니의 이런 태도는 영화가 지닌 특유의 관조성에 힘을 더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건의 단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오가는 그가 이성적인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서는 데 반해 이를 대하는 주변 인물들이 내비치는 격앙된 감정은 특히 인상적이다. 말하자면 제니는 영화 속에서 또 하나의 카메라가 되어 주변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의 커다란 눈에 걸리는 피사체들은 결국 객관 앞에서 자신의 양심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 중반 이후 차차 드러나는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주변 인물들이 지닌 비밀은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이는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다"는 제니의 소명과 더불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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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의 고군분투 뒤로 엿보이는 사회 곳곳의 불편한 민낯 또한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다. 특히 제니의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면면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신분을 숨기고 성매매 일을 한 탓에 죽은 뒤 '언노운 걸'로 남은 소녀는 물론, 심한 상처에도 여권을 요구하는 큰 병원에 가길 꺼리는 불법체류 외국인, 발을 다쳐 연금 혜택을 받으러 가지 못하는 노인, 여기에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술에 의지하는 싱글맘까지. 종합병원 의사직을 마다하고 적은 수입의 동네 병원에 남기로 한 제니의 선택은 이들의 실상과 맞물려 의미심장하다.

"제니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한다."

감독 뤽 다르덴의 이 말처럼, 결국 <언노운 걸>이 역설하는 건 익명성 뒤에 숨은 정의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는 익명성을 무기로 타인을 착취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익명성 때문에 방치된다. 이 불합리 속에서 수많은 '목격자'들이 그저 침묵한다. 스피커폰 너머에서 다급히 벨을 누르며 도움을 청한 소녀를 외면했던 제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영화 말미 "소녀가 죽었으니 이미 끝난 것"이라는 말에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롭겠죠"라고 답하는 제니의 대사는 영화가 역설하는 '양심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는 5월 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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