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정생존자>의 포스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주인공에게 갑작스러운 의무가 주어진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포스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주인공에게 갑작스러운 의무가 주어진다.ⓒ ABC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만났다. 총리 공관에서 공동기자회견 '무대'에까지 섰다. "한미 동맹 강화" 같은 고전적인 구호는 물론 "주한미군 사드 조속 배치" 입장도 발표했다.

'박근혜 탄핵' 이후 황 대행은 정말 많은 걸 누렸다. 지난 3월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파면' 직후 불출마 선언을 하기 전까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범보수 대선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황교안 대행이 대선 출마를 고심 중인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적지 않았다. 탄핵 이후 대행직에 올라서는 이른바 '대통령 놀이'도 할 만큼 했다. 시장도 가고, 군대도 가고, 총리 시절보다 더한 '민심행보'를 밟으면서 의전도 받을 만큼 받았다.

조기 대선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황 대행이야말로 국민이 만들어준 탄핵 사태의 최대 수혜자일지도 모른다. 권한은 누릴 대로 누렸는데, 그가 뭘 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예컨대, AI(조류인플루엔자) 피해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조속한 대처만 뒤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달걀 가격 폭등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축산업계, 자영업자들, 서민들만 울상이다. 황 대행의 최대 목표는 보수권이 열망하는 '사드 배치'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여기 황 대행은 상상도 못 할 황망한 상황, 아니 정치드라마 사상 최악의 상황에 놓인 대통령 대리인이 있다. 대통령은 물론 자신을 제외한 정부의 모든 각료가 사망했다. 가공할만한 미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에 의해서다. 그리하여 남은 최후의 1인인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이 미 행정부를 이끌어야 한다. 물론 전 국민 앞에서 대통령 선서를 하고 난 뒤에. 미 A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의 출발은 이렇게 극적이다.

대통령도, 각료들도 모두 사망한다면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은 그를 그다지 탐탁잖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나아가야 한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은 그를 그다지 탐탁잖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나아가야 한다.ⓒ ABC


<지정생존자> 속 커크먼 장관의 승계 서열은 고작 13위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헌법 71조에 따르면 첫 번째가 국무총리이고, 이후 정부조직법 22조에 의거 기획재정부장관이 겸임하는 부총리, 교육부 장관이 겸임하는 부총리 순이다.

이들까지 직을 유지할 수 없다면,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순으로 직을 승계하게 된다. 이 대통령 승계 서열이야말로 국무위원들의 권력 순위라 할 만하다. 당연히, 이 순위는 국가별로, 정권별로 다르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커크먼은 권력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는 과정 역시 민주주의의 원칙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비단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라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물론 하원의장과 상원 임시의장까지 모두 한날한시에, 폭파된 미 국회의사당에서 사망한, 드라마 사상 아주 강력한 위기 상황이라서 그렇다.

이렇게 '지정생존자'는 연두교서나 대통령 취임식 등 대통령 이하 권력 계승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사시를 대비해 이들과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하는 인물을 뜻한다. 한 마디로, 커크먼의 대통령직 수행은 드라마 속 극한 테러가 준 천상의 선물(?)에 가깝다.

본인도 질색이다. 살아남은 관료들, 정치인들도, 백악관 직원들도 그가 탐탁지 않다. 국민도 반신반의다. 그런데도 국가를 위해 누군가는 가공할만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지정생존자' 커크먼의 의무다.

정치 드라마와 정치 스릴러 사이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정치 드라마와 정치 스릴러 사이에서, 이 작품은 한국 팬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정치 드라마와 정치 스릴러 사이에서, 이 작품은 한국 팬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ABC




그러는 사이, 일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었던 커크먼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진 않았지만,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준전시에 가까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테러범들도 잡아야 하고, 호시탐탐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이들도 제압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선행돼야 할 것 들이 한둘이 아니다.

사실 <지정생존자>는 정치드라마를 가장한 정치 스릴러 장르라 할 수 있다. 커크먼의 '통치 기술'은 사실 단순하다. 지극한 '휴머니즘'과 '원칙주의'는 캐릭터 자체의 온화한 성품(자연스레 백악관에 입성한 커크먼의 가족들이 비치는 이유다)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 자체가 <하우스 오브 카드> 부류의 복잡다단한 정치의 기술을 다룰 생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상이나 사생활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테러범을 쫓는 FBI 요원 해나(매기 큐 분)의 존재는 그래서 필요하다. 국회의사당 폭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테러의 위협은 끊임없이 미국과 커크먼을 위협한다. 거대한 테러범들의 정체는 한 회 한 회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심지어 커크먼이 총기 암살 시도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생화학 테러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 가까스로 살아남은 부통령 지명자가 테러와 연관된 인물로 밝혀진 뒤 살해를 당하기까지 한다.

물론 <지정생존자>가 이러한 액션 스릴러의 공식만 따르는 건 아니다. 커크먼의 '대통령직'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비단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다. 정통성 없는 대통령에게 반발하는 주지사, 생존한 공화당 측 하원의원은 커크먼의 편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수석 비서관으로 임명한 전 대통령의 스태프 역시 의심이 가긴 마찬가지다. 이 상존한 적들의 위협을 무사히 제거해야 하는 가운데 국민의 지지까지 얻어내야 하는 '지정생존자'의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과장된 상황인 건 맞지만, 그런 과장이 잘 짜여진 '미드'의 매력 아니겠는가.

비선출직 대통령, 황교안과 커크먼의 차이 

<지정생존자>가 깊이 있는 정치드라마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미 국회의사당 폭파라는 충격적인 초반 소재에 기대는 '소재주의' 드라마의 한계도 분명하다. 전설적인 액션 드라마 <24시>의 '잭 바우어' 키퍼 서덜랜드가 온화한 대통령을 연기하는 것도 살짝 어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이 커크먼이 보여주는 책임감과 국정 운영의 원칙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비선출직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는 과정이나 커크먼 자신이 그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해가는 궤적은 '대통령직'이란 과연 무엇인지, 특히 안보나 테러의 위협 상황에서 대통령이란 콘트롤타워가 튼튼하고 믿음직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넷플릭스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지정생존자>를 접한 많은 시청자는 국내 정치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탄핵 정국으로 인해 순식간에 콘트롤타워가 부재했던 시기와 시즌1의 방영 시기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교안 대행의 활약(?)이 두고두고 국민의 원성을 사면서 커크먼의 강직함은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부재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드라마와 우리네 현실이 살짝 다른 방향으로 반영하는 중이다. 그리고 <지정생존자> 속 위기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드 배치와 북 핵과 관련 최근 들어 유례없는 미국과 중국의 강한 압박을 받는 중이다. 이 드라마, 황교안 대행과 전직 대통령을 보좌했던 이들이 본다면 뜨끔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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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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