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여타 하위 장르들처럼 생존 영화류도 확실히 단언하여 선을 긋기는 힘들다. 재난 영화 대부분이 캐릭터들의 생존/구출 과정을 다루므로 재난영화나 생존영화는 같은 부류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이 두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는 블록버스터 스케일로 제작 되어지므로 (배경 특성상) 단순히 블록 버스터로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생존 영화가 영화사 만큼이나 유지되고 사랑받아온 비교적 장수 장르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기억할 만한 대작들을 꼽자면 60년대에 개봉되었던 <타워링>이라든지 90년대에 들어서 물밀듯 개봉되었던 화산 영화들 <단테스피크>, <볼케이노>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디카프리오에게 오스카 상을 안겨주었던 <레버넌트>까지 광범위하게 생존 영화 범주에 넣을 수 있을 듯하다. 

리암 니슨 주연의 <더 그레이>는 전형적인 생존 영화로서, 오일 플랜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귀향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겪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 생존 영화의 법칙이란 것이 한두 번 본 관객들은 외워서 읊조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은가. 산이나 섬 등의 비교적 조건이 좋지 않은 환경에 고립-음식과 물 부족으로 갈등 고조 – 갈등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인, 혹은 사건 – 결국 주인공을 포함한 소수 인원 탈출 혹은 구출. 

 영화 <더 그레이>

영화 <더 그레이> ⓒ (주)팝 파트너스


생존영화의 공식 배반한 영화 <더 그레이>

모두가 알 것이라고 단언하면서도 굳이 이 영화를 들고 온 이유는 <더 그레이>가 위에 언급한 공식을 차용함과 동시에 배반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일단, 주인공들이 예기치 않게 착륙하게 되는 곳은 눈으로 뒤덮인 산간 지방이다(앵커리지로 가는 비행기였으니 북쪽 지방 어디쯤 일 것이라 예상된다). 이 곳에서 겪게 될 난관은 뻔하다. 일단 눈사태와 지속적인 추위로 주인공들은 고통 받을 것이고 어떻게든 불을 구하고 나면 음식과 물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취하는 공식의 배신이 여기서 시작이 된다. 죽은 시체의 가방을 뒤져 외투를 챙기고 기내 잡지를 이용해 불을 얻어낸 다음 주인공들이 맞서게 되는 장애는 다름 아닌 늑대다(영화제목, <더 그레이>는 늑대를 뜻한다). 늑대는 사람을 놀래 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생존자 중  한 명을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뜯어먹는다. 

이 시점부터 늑대는 이 생존 영화의 유일무이한 적이 된다. 늑대를 피해 강으로 피신하는 도중 두 명의 생존자가 늑대에 잡아 먹힌다. 

결국 이 과정에서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테이큰>(Taken)의 영웅, 리암 니슨과 그 나마 가장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생존자 한 명이 남는데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두 명이 가까스로 구출되며 영화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웅 한 명만 살아 남는 것은 너무 뻔하다 못해 비도덕 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본 역대 재난 영화나 생존 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주인공 한 명만 달랑 남겨놓는 경우는 드물다. 앞서 언급한 <단테스피크>에서는 주인공과 주인공 여자친구, 여자친구의 가족들, 그리고 그 집 개까지 살려놓지 않았는가 (참고로, 개를 죽이는 미국 영화는 참으로 보기 힘들다). 

 영화 <더 그레이>

죽은 시체의 가방을 뒤져 외투를 챙기고 기내 잡지를 이용해 불을 얻어낸 다음 주인공들이 맞서게 되는 장애는 다름 아닌 늑대다. ⓒ (주)팝 파트너스


 영화 <더 그레이>

<더 그레이>의 시작에서 끝까지 그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이나 기적의 힌트 같은 것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 (주)팝 파트너스


<더 그레이>의 배신이 여기서 또 한번 일어난다. 그 도덕적인 생존자마저도 늑대의 추격을 피하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게 된다. 주인공, 리암 니슨은 좌절한다. 그리고 그 좌절이 극복되지 않은 채 그는 희망을 버린다. 허나, 이쯤 되어 관객들은 생각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미스터 테이큰, 리암 니슨은 나이에 맞지 않는 체력과 그간 쌓아온 (전작들에서) 액션 스킬이 있지 않은가. 갱단의 무리 전체를 해치웠던 그가 늑대 몇 마리로 무너지겠는가.  그리고 예리한 관객들은 타이밍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대개 헬기가 뜨거나 안 되던 핸드폰이 터지거나, 어떠한 형태의 구원의 손길이라도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 영화의 마지막 배신이 여기에 있다. <더 그레이>의 시작에서 끝까지 그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이나 기적의 힌트 같은 것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리암 니슨조차 관객의 기적이 되지 못한다. 한참을 절망하고 숲을 걷던 그는 마침내 그가 늑대 소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 때 알파(the alpha: 늑대 무리에서 우두머리를 뜻함)가 등장하고 리암은 자신의 주먹에 유리조각을 덧대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의 비장한 클로즈업 위로 영화는 앤딩 타이틀을 뿜어낸다. 이를 보면서 느꼈던 허무함과 분노가 기대하지 못했던 수준의 게이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다 짜놓은 고스톱 패를 누군가 엎어버린 느낌이랄까. 관객이라는 것이 참 희한한 존재다. 우린 뻔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뻔한 계산에서 비껴나가면 배신감을 느낀다. 물론 그게 유쾌할 수도 있고 필자처럼 역정이 날 수도 있다. 

 영화 더 그레이

'한 명은 살아남는다'는 공식 만큼은 지켜졌으면 한다. ⓒ (주)팝 파트너스


욕을 부른 엔딩, 이에 대한 학문적 연구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존재해왔다. 관객의 심리를 연구하는데 가장 많이 차용된 학문으로는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관객이 주인공을 자신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죽거나 부도덕한 인물이라면 관객들은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크리스천 메츠). 많은 남성 관객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보고 나면 찝찝하다"라고 반응 하는 것을 관객들이 극 중의 지질한 남자 주인공과 자신을 은연 중에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맥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신분석학적인 입장은 영화학자들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관객 모두가 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이 남자이고 관객이 여자라면 동일시하기 힘들 것이고, 이는 성별뿐 아니라 인종, 나이, 그 외 다른 데모그래픽한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두 주장 중 어떤 것이 더 현실에 가까운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더 그레이>가 필자에게 예상치 못한 쾌감보다 분노에 가까운 배신감을 주었던 것은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 즉, 이 영화가 인간의 생존을 전제로 하는 영화라는 사실이었다. 필자가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있었다면 결말이 다소 뻔하지 않더라도 분노했을까. 두 시간 남짓 등장인물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굴욕적인 결정들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생존자들이 죽어나가는 것까지 인내했지만 결국 하나 남은 그 누군가가 생존도 희망도 아닌 죽음과 절망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려있는 것이 결말이라면 독자들 중 몇 명이나 그 '의외성'에 쾌감을 느낄 것인가. 

앞으로도 재난 영화나 생존 영화가 쏟아져 나올 것 이다. 가족이야기를 먼저 꺼내거나 사진을 들춰보는 캐릭터가 먼저 죽는다는 공식도 계속 지켜질 것이다. 감독에 따라서 혹은 다른 이유로 장르적인 트위스트가 어딘가에서 이루어지겠지만 '한 명은 살아남는다'는 공식 만큼은 지켜졌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문화 블로그, 월간 이리에 기고했던 글을 확장, 수정 하였습니다.
재난영화 생존영화 리암 니슨 헐리우드 영화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