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 수원 삼성 구자룡,이정수가 FC 서울 데얀과 볼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 수원 삼성 구자룡,이정수가 FC 서울 데얀과 볼다툼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최악의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올 시즌 개막 이후 리그 무승에 그치며 극심한 부진을 이어가고 있는 K리그 클래식 수원이 이번엔 선수와 팬의 감정적 대응까지 겹쳐 더 큰 후유증을 빚고 있다.

수원의 수비수 이정수는 지난 18일 구단 측에 돌연 은퇴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수는 중동 리그에서 활약하다가 지난해 2월 친정팀 수원으로 복귀했다.

2002년 안양 LG(현 FC서울)에 입단해 프로에 데뷔한 이정수는 인천 유나이티드를 거쳐 2006년부터 수원에서 입단해 세 시즌을 활약했고 2009년 이후에는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와 카타르 알 사드 등 해외 리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0년에는 국가대표로 남아공월드컵에서 출전해 수비수임에도 2골을 기록하며 한국축구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도 기여했다.

이정수는 선수 생활 말년에 친정팀인 수원과 K리그로 돌아와 유종의 미를 꿈꿨다. 지난 시즌에는 팀의 FA컵 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하지만 수원은 올시즌 개막 이후 리그 6경기 연속 무승(5무 1패)로 10위라는 저조한 성적에 그치며 최악의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 이정수도 거듭된 부상으로 고작 3경기 출전에 그치며 활약도 저조한 편이었다.

지난 16일 광주FC와의 홈경기에서 또다시 졸전 끝에 0-0 무승부에 그친 이후 이정수는 돌연 팀에 은퇴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은 사전에 전혀 논의가 없었던 주축 수비수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수의 갑작스러운 은퇴 결정에는 광주전에서 벌어진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K리그에서도 열성적이기로 소문난 수원 팬들이 계속된 팀의 부진에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광주전이 끝난 이후 선수단에게 야유와 욕설을 퍼부은 것이 원인이었다.

특히 일부 극성팬들은 그라운드에 맥주캔 등 이물질을 투척하고 이정수와 몇몇 선수들을 향해 인신모욕적인 욕설까지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수도 화를 참지 못하고 일부 팬들과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갈 뻔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간신히 불상사는 피했다.

이정수는 이 사태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친정팀에서 축구 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성적부진에 대한 압박감이 컸던 데다 든든한 우군이라고 믿었던 홈팬들에게까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데 회의를 느끼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수는 이미 지난 해부터 은퇴 시기를 고심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번 사태가 결심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은퇴하겠다는 이정수, 이해는 가지만...

이정수가 당시 받았을 상처와 고민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결정이라는 아쉬움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수에게 행해진 인신공격적인 모욕이나 물리적 위협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저지른 이들은 전체 수원 팬들 중에서는 일부 소수였다. 오히려 당시 팀의 부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팬들도 많았다.

어딜 가나 과격한 극성팬들은 존재하는 법이며 '선을 넘은' 이들에게는 향후 법적으로든 구단 자체적으로든 그에 걸맞은 조치를 내리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정수는 은퇴라는 방식으로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길을 택했다. 본인은 물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겠지만 시기나 방식 등 모든 면에서 누가 봐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처신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정수에게 맥주캔을 투척하고 욕을 퍼부은 극성팬보다도 성숙함 면에서 하나도 나을 게 없다.

팀의 맏형으로서 이럴 때일수록 후배들을 다독이며 선수단 분위기를 추슬러도 모자랄 시점에 오히려 혼자만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불난 배에서 먼저 뛰어내리겠다는 것은 프로다운 처신이 아니다. 구단 입장에서 봐도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의 소지도 있다.

본인이야 어차피 은퇴가 가까웠던 상황에서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라고 위안하면 속은 편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해 수원 선수단의 전력과 팀분위기에 끼칠 또다른 피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정수와 수원을 진심으로 믿고 응원했던 다수의 선량한 팬들에 대한 배신감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한편으로 이번 사태를 통하여 일부 극성팬들의 그릇된 응원 문화 역시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나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핑계로, 삐뚤어진 피해의식과 증오심을 배설하는 일부 극성팬들의 행태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부류가 전체  축구팬이나 서포터즈 중에서는 극히 소수라고 할지라도 미꾸라지 한두마리가 맑은 물 전체를 흐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축구는 열성적인 팬들이 많은 스포츠다. 특히 K리그는 서포터즈를 중심으로 한 집단행동이 다른 종목에 비하여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팬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예전보다 구단이나 선수단과의 갈등 혹은 충돌이 빈번해지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팬들 입장에서는 분발을 촉구하는 야유와 질타도 응원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현장에서는 성적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회초리를 드는 팬들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12번째 선수이자 가장 든든한 우군이라고 믿었던 팬들이 등을 돌릴 때 어쩌면 적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사태가 보여준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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