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월화 드라마 <혼술남녀>는 '혼술 라이프'를 다루고 있다.

ⓒ tvN


노량진에 청춘을 저당 잡힌 청년들의 이야기로 많은 감동을 준 드라마 tvN <혼술남녀>. 하지만 이 드라마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막내 PD는 죽음을 택했다. 불합리한 제작환경과 조직문화에 고통받고, 위에서 결정한 하청 업체 계약 해지의 실무를 담당하며 그들을 어려움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죽음을 택한 신입 조연출 고 이한빛 PD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2016년 1월 18일 CJ E&M PD로 입사했다. 3개월간의 내부 교육과정 수료 후 같은 해 4월 <혼술남녀> 팀에 배치되었으며, 신입 조연출로서 의상·소품·식사 등의 촬영 준비부터 데이터 딜리버리·촬영장 정리·정산·편집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혼술남녀>의 마지막 촬영 날인 2016년 10월 21일 실종되었으며, 26일 사망한 채 발견됐다.

유가족 "아들 실종돼 불안한 어머니에게 아들 비난"

 고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가 기자간담회에서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CJ E&M을 규탄했다.

고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가 기자간담회에서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CJ E&M을 규탄했다. ⓒ 김윤정


고 이한빛 PD의 유가족을 중심으로 결성된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 6개월간의 조사 결과와 입장, 향후 활동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유가족 대표인 어머니 김혜영씨는 "뒤늦게 아들의 실종 연락을 받고 불안한 마음으로 tvN을 찾아가 선임 PD를 만났다. 선임 PD는 한 시간 넘게 아들이 얼마나 불성실했으며,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며 비난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믿을 수 없었지만, 엄마 된 입장에서 우선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후 발견된 아들의 유언장을 보고 나서야 선임 PD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김씨는 "이는 철저한 책임회피였다"면서 "함께 일하던 막내 조연출이 종방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찾을 생각도 않고 새벽까지 먹고 마셨으며, 실종신고가 들어가자 책임회피를 위해 엄마에게 아들을 비난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건 아들의 생사가 아니라 아들이 가지고 있던 법인 카드"라며 눈물을 쏟았다.

대책위는 고 이한빛 PD가 과도한 업무는 물론, 괴롭힘으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주장했다. 유가족이 공개한 메신저 대화, 녹취록에는 이 PD를 향한 욕설과 비아냥 등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CJ E&M 측은 "연출팀 내에서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이는 고 이한빛 PD의 성격, 근무 태만의 문제이고, 이례적인 수준의 따돌림, 인권침해는 없었다. <혼술남녀>의 근무 강도가 타 프로그램에 비해 특별히 높은 편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대책위는 CJ E&M 측의 이 같은 반박에 대해 "고인이 몇 번 현장에 지각한 적은 있으나 이는 고강도 노동이 지속하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수준이었으며, 단체 카톡창 대화를 보면 다른 조연출이 지각했을 때는 부드럽게 넘어가다가, 고 이한빛 PD가 지각했을 때는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 재반박했다.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는 선임 PD의 발언에 대해서도 "고인은 청년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입사해 받은 급여 대부분을 416연대, KTX 해고 승무원, 빈곤철폐연대 등에 기부하기도 했다. 고인이 비정규직과 마찰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다.

고 이한빛 PD 유서 발췌
많이 꼬여있었어요. 이십대의 삶은.
항상 더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앞선 단계의 고민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도약이었어요.
다음 단계로 넘어갈수록 고민은 얽히고 섥혀 풀수 없게 되어버렸네요.
  
당연하게도 사회생활이란 그렇게 즉각적인 승리감을 주는 곳이 아니었더라구요.
나를 버티게했던 동력이 더이상 공급되지 않으니 남은 선택이 없네요.
    
촬영장에서 스탭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솔직히 예상 못했어요.
사회가 굴러가는 데 필수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둥지를 틀면
운동을 저버리고 내 영달을 찾더라도 세상의 모순과 빗겨날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죠.

바로 이 판을 나왔어야 했는데, 알량한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네요.
지금 그만두면 패배자이자 중도포기자 낙인이 찍힌다는 두려움에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네요.

상태가 이러니 그나마 노동착취하는 관리자 일조차 제대로 하질 못했구요.

CJ E&M 측 "살인적 업무 환경은 업계 관행"

고인이 견뎌야 했던 살인적인 근무 강도에 대해 CJ E&M 측은 "업계 관행"이라고 항변했지만, 대책위는 "'드라마계 관행'이라는 말로 장시간, 고강도 노동과 잘못된 조직문화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드라마업계의 잘못된 관행과 제작 구조 속에서 벌어진 사회적 죽음"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의 책임 중 상당수는 경험이 없는 정규직 신입 막내 조연출에게 전가됐다. 일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음에도 모든 잘못은 그의 잘못이 되었고, 개인의 근무 태만으로 규정됐다"면서 "회사 내에서 가장 약하고 지위가 열악한 신입사원들의 희생과 상처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대책위는 "고인의 죽음을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약한 개인의 자살로 이야기하며 책임없음을 주장하는 CJ의 행태를 규탄한다"면서 "고 이한빛 PD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식 사과와 재발 방치 대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페이스북에 페이지(http://www.facebook.com/tvn.honsul.pd)를 개설해 사건 진행 과정을 지속해서 알릴 예정이며, 사용자 측의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내일(19일)부터 상암동 CJ E&M 본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 진행,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 추모제(4월 28일 오후 7시) 등 오프라인 행동도 이어간다. 또, 고인과 같은 어려움에 있는 이들과 함께 대응하기 위해 '드라마 현장 내 노동실태와 폭력에 대한 제보센터'도 운영한다. 온라인 신고센터는 19일부터 5월 초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입장발표 기자간담회.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입장발표 기자간담회. ⓒ 김윤정



혼술남녀 조연출 사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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