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이상해>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로 설정된 정소민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로 설정된 정소민ⓒ KBS


'드라마는 갈등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물간의 대립은 드라마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KBS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관계가 나온다. 형제자매간의 갈등, 부모와의 갈등, 연인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갈등 등, 뜯어보면 모든 관계는 갈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 중,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는 갈등 중 하나는 바로 변미영(정소민 분)과 김유주(이미도 분)의 갈등이다. 그들의 악연은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유주는 학창시절 변미영의 뚱뚱한 몸을 약점 삼아 괴롭혔던 학교폭력 가해자다. 변미영은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시절은 고스란히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동창회에서 김유주의 모습을 보고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쪽은 변미영이다.

동창회 정도로 끝이 난다면 다행이지만 악연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변미영이 힘겹게 취직한 회사에 바로 김유주가 있었기 때문. 직속 상사는 아니지만, 김유주는 이미 팀장이다. 인턴으로 겨우 회사 생활을 시작한 변미영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김유주는 여전히 변미영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고 가해자지만 피해야 하는 쪽은 또다시 변미영이다. 살을 뺀 변미영을 못 알아 보던 김유주가 변미영을 알아보자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김유주는 여전히 뚜렷한 이유 없이 변미영을 못마땅해 하며 변미영 앞에서 대놓고 신경을 긁거나 부당한 일을 시키거나 하며 변미영을 괴롭힌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픈 과거, '사이다'를 위해서라기엔 가혹하다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여전히 상처받는다.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여전히 상처받는다.ⓒ KBS


학창시절 이후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변미영은 여전히 김유주의 발아래 놓여있다. 단순히 사회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그 때 당했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는 현재도 영향을 미친다. 변미영은 김유주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떨린다. 당한 건 변미영이지만 피하는 쪽도 변미영이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하다. 

드라마는 이런 상황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바로 변미영의 오빠 변준영(민진웅 분)을 통해서다. 김유주는 변준영과 사귀고 있는 상태고, 급기야 임신까지 한다. 중간에 변준영의 거짓말로 인해 사이가 위태로워지지만 뱃속의 아이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매개채로 이용되고 김유주와 변준영은 결국 결혼을 결심한다. 변미영과 김유주의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런 전개는 나중에 김유주에게 변미영 측이 던질 통쾌한 한방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변미영의 언니인 변혜영(이유리 분)은 변미영과 다르게 당당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을 줄 알며,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캐릭터다. 막내 동생 변라영(류화영 분) 역시 천방지축에 할 말 다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변미영의 상황을 알면 시원한 탄산음료를 들이키는 느낌의 통쾌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통쾌함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학교 폭력 희생자에 대한 드라마의 시선은 안타깝다. 김유주가 변미영의 집으로 인사를 온 날,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지만 변미영은 가족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변준영이 김유주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유주가 임신했기 때문인 탓이 더 크다. 작가는 김유주의 임신으로 두 사람이 앞으로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복선을 깐다. 그것이 바로 한국 가족 드라마의 정서고, <아버지가 이상해>는 바로 그 정서를 답습할 수밖에 없는 가족극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받는 피해자, 극복은 개인의 몫인가?

 학교 폭력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선 안 된다.

학교 폭력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선 안 된다.ⓒ KBS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김유주를 받아들이면 앞으로 변미영은 끊임없이 고통받을 것이다. 김유주를 마주쳐야 할 때마다 오는 떠올리기 싫어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고통의 시간들을 변미영에게 감당케 하는 것은 지나친 폭력이다. 물론 드라마는 이 둘의 분위기를 점점 화해 모드로 변모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그리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무리 김유주가 후에 개과천선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해도 가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황이 억지로 형성되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용서했다는 뜻이 곧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용서와 관계는 별개의 문제다. 용서를 했다고 하여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다 잊자고 결심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과거고, 사과를 해도 저질렀던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김유주가 오빠와 결혼을 원하면서 칼자루를 쥔 쪽은 변미영이 되었지만, 변미영은 여전히 피해자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고 얼마나 힘들어야 했는지 가족에게조차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억울하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는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사과를 하는 쪽이 희생을 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억지로 하는 사과는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다. 김유주가 그렇다. 변준영과 변미영의 관계를 알기 바로 몇 시간 전만해도 김유주는 변미영을 부당하게 괴롭히며 '갑질'을 서슴치 않았다. 관계를 알고 나서 바로 돌변한 김유주의 친절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소름이 끼칠 뿐이다. 진정어린 사과를 할 거라면 변미영이 원하는 사과를 해야 한다. 변미영은 "원하는 것이 뭐냐"는 김유주의 질문에 "너랑 가족이 되지 않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 뜻을 존중해 줘야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있다. "그건 못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해"라고 얘기해 봤자 목적을 위한 사과가 될 뿐이다.

용서와 화해의 강요, 제 3자가 아닌 당사자에게는 폭력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과 가족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과 가족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KBS


용서도 좋고 화해도 좋다. 그러나 학교 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데 모아두고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도 끊길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결국에는 화해할 수밖에 없는 뉘앙스로 몰고 간다. 그것이 과연 학교 폭력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변미영이 극복해야 할 과제처럼 몰고간다. 가족들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혼자 갈등하며 김유주를 상대해야 하는 쪽은 변미영이다. 김유주를 마주칠 때마다 혼자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는 것도 물론 변미영이고 반격을 한 번 할 때마다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것도 변미영이다.

이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마음을 공감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가족이다. 변미영과 김유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무관심 나아가 학교의 잘못된 시스템과 분위기가 만든 사회적인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것은 변미영 개인이고, 결국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변미영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다.

학교 폭력 가해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누가 치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드라마는 용서를 납득할 만한 계기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