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에릭 로메르 회고전의 포스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에릭 로메르 회고전의 포스터.ⓒ 서울아트시네마


에릭 로메르는 프랑스 누벨바그(새롭게 등장했던 프랑스 영화 경향)의 일원이지만, 1920년생으로서 장뤼크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 등 다른 감독들보다 열 살 정도 연배가 높습니다. 교사, 영화 평론가, 소설가 등의 직업을 거치며 틈틈이 단편 작업을 했는데, 만 42세 때 공개된 <사자자리>(Le signe du lion)가 장편 데뷔작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비교적 완결된 내러티브 구조를 지녔고, 인물들 간에 주고받는 대사 중심이며,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다룹니다. 일종의 '영화로 보는 소설'에 가까우므로, 이른바 '예술 영화'라고 하면 지루하고 난해한 영화를 떠올리는 일반 관객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파리의 명소나 프랑스의 대표적 휴양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홍상수 감독 영화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홍상수 감독은 자기가 좋아하는 감독으로 에릭 로메르를 자주 언급한 바 있고, 그의 작품들은 에릭 로메르의 초기작인 도덕 이야기 연작들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대부분 자기 연민과 냉소 뒤에 숨어 자신의 자아를 지키는 데 관심이 있는 쪽입니다. 그와 다르게, 에릭 로메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낼 줄 알지요. 이 점이 세계적인 거장과 그렇지 않은 감독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에릭 로메르는 컷을 최소화하여 한 신을 하나의 카메라 세트업으로 보여 주는 '원 씬 원 컷'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담백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미장센과 편집이 뒷받침돼 있습니다. 미술 세팅-인물의 배치 및 동선-카메라의 움직임이 어우러진 화면 구성, 그리고 씬과 신을 연결하는 장면 전환의 논리가 명확한 편집 양식 등을 확인해 본다면 관람의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연애의 모럴-에릭 로메르 회고전'을 엽니다. 대부분은 2001년과 2007년에 있었던 회고전, 그리고 여러 기획전에서 다른 영화들과 함께 한 번씩은 소개됐던 작품들입니다.

그렇지만, 만년의 작품인 <삼중 스파이>(2004)와, <녹색 광선>의 주연 배우 마리 리비에르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에릭 로메르와 함께>를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해 자체적으로 진행한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로서, '희극과 격언' 시리즈 6편, '사계절 이야기' 시리즈 4편을 DCP로 상영한다고 합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에릭 로메르 영화의 편집을 도맡았던 마리 스테판과의 대화도 마련돼 있습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계에 처음 진입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입문용 작품 4편과, 이미 널리 알려진 대표작들을 어느 정도 섭렵했다 하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 3편을 소개합니다.

입문용 추천작 네 편 중 앞에 두 작품은 로메르 영화의 화법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뒤에 두 작품은 특유의 풍자적 어조가 감동적인 결말로 바뀌는 마술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인 걸작들입니다.

[하나] <해변의 폴린>(1983)

 <해변의 폴린>의 한 장면. 폴린(아만다 랑글레)은 해변에서 만난 실뱅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해변의 폴린>의 한 장면. 폴린(아만다 랑글레)은 해변에서 만난 실뱅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서울아트시네마


사랑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마리온(아리엘 동발)과 사촌 동생 폴린(아만다 랑글레)은 해변가로 여름 휴가를 옵니다. 육감적인 매력의 마리온은 머지않아 삼각 관계에 빠지지만, 폴린의 눈에는 그런 게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싶을 정도로 시시해 보입니다.
로메르 영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의 엇갈리는 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이면에 숨겨진 의도가 빚어낸 희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런 특징이 아주 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연 아만다 랑글레는 <여름이야기>(1996)와 <삼중 스파이>(2004)에도 출연하여 로메르와 인연을 이어갑니다. 1983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

[둘] <클레르의 무릎>(1970)

결혼을 앞두고 휴가를 떠난 제롬(장 클로드 브리알리)은 옛 친구이자 소설가인 오로라가 의도적으로 소개한 소녀 로라(베아트리스 로망)와 친해집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매혹된 것은 로라의 이복자매 클레르이지요. 특히 그녀의 무릎에 집착하게 된 제롬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대화를 나눌지라도 자기 속마음을 얼마든지 감출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눈빛과 행동까지 속이지는 못합니다.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이 아는 정보의 차이에서 나오는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다른 도덕 이야기 연작처럼 남성의 욕망과 행동의 불일치를 풍자적으로 다룬 것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앳된 소녀로 나온 베아트리스 로망은 <아름다운 결혼>(1982), <가을 이야기>(1998)에서도 주연을 맡아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셋] <녹색 광선>(1986)

 <녹색 광선>의 한 장면. 델핀(마리 리비에르)는 2주간의 여름 휴가 동안 여러 장소를 오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녹색 광선>의 한 장면. 델핀(마리 리비에르)는 2주간의 여름 휴가 동안 여러 장소를 오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서울아트시네마


파리에 사는 델핀(마리 리비에르)은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여름 휴가를 같이 가려던 친구가 같이 못 가겠다는 연락을 하고, 꼼짝없이 혼자서 2주간의 휴가를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이때부터 델핀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가지들을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답답한 성격의 주인공이 겪는 정처 없는 바캉스 여행이라니 듣기만 해도 재미없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델핀의 열망을 금세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사정이 제발 좀 나아지기를 바라는 관객의 마음과 영화 속 현실의 간극은 영화에 대해 더 몰입하게 합니다. 여러 편의 로메르 영화에 나온 마리 리비에르의 연기가 정말 뛰어납니다. 198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여우주연상 수상.

[넷] <가을 이야기>(1998)

포도 농장을 가꾸며 혼자 사는 40대 중반의 미망인 마갈리(베아트리스 로망)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는 싶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지냅니다. 그런 상황을 잘 아는 이자벨(마리 리비에르)은 괜찮은 남자를 물색하여 마갈리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젊은 층의 사랑 이야기를 많이 다뤘던 기존의 로메르 영화들과는 달리, 성숙한 중년의 감정을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속에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 주연 배우 베아트리스 로망의 매력이 한껏 잘 살아 있고, 낙관적 결말이 주는 행복감도 큽니다. 1998년 베니스영화제 각본상 수상.

다음의 세 작품은 이미 로메르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꼽아 보았습니다.

[다섯]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

공무원으로서 파리의 신도시 라데팡스 지구에 사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블랑쉬는 활달한 성격의 레아와 만나 친해지게 됩니다. 레아는 블랑쉬에게 자기 남자친구 파비앙의 친구인 알렉상드르를 소개해 주죠. 하지만, 정작 블랑쉬가 사랑에 빠진 것은 알렉상드르가 아닌 파비앙입니다.

내용상 엇갈리는 사각 관계를 집요하게 다루는 통속적인 멜로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입니다. 신시가지 라데팡스-파리 도심의 카페-불로뉴 숲 등 여러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그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의 속내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지 확인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로메르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시 한번 돌이켜볼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여섯] <O 후작 부인>(1976)

18세기의 북이탈리아, 남편을 잃은 O 후작 부인(에디트 클레베)은 러시아군이 침공하자 가족들과 함께 대피합니다. 러시아 군인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그녀를 어떤 러시아 백작(브루노 간츠)가 구해 냅니다. 그런데 우연히 지쳐 잠든 후작 부인의 모습을 본 러시아 장교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혹됩니다. 얼마 후 후작 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했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합니다.

이 영화는 에릭 로메르가 처음 찍은 사극입니다. 후작부인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당시의 고루한 성 윤리와 종교적 엄숙주의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쓴웃음을 짓게 만들죠. 연극 무대처럼 잘 세팅된 미장센이 돋보이며, 언제나처럼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의 향방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감독의 다른 시대극으로는 <갈로아인 페르스발>(1978), <영국 여인과 공작>(2001), <로맨스>(2007) 등이 있습니다. 1976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일곱] <나무, 시장, 미디어테크>(1993)

프랑스의 한 시골 도시의 사회당 소속 시장(파스칼 그레고리)은 지역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문법교사(파브리스 루치니)가 나서 녹지 훼손을 이유로 미디어테크의 건립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영화는 이때부터 미디어테크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차근차근 보여 줍니다.

지역의 개발 사업을 둘러싼 갖가지 논란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을 취해 낱낱이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정치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이 일상화된 프랑스 지방 자치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 주는 것이 핵심이죠.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돼 있음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결론이나 개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요즘 개봉하는 영화 중에서 딱히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서울아트시네마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가져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상영작 및 일정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심을 담습니다. 다만 진심입니다. 제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제 진심이 닿으리라 믿습니다. 공채 7기 입사, 사회부 수습을 거쳐 편집부에서 정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오마이스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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