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의 어느 날, TV에서 김경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다음날 바로 매장에 달려가 그의 최신 앨범 테이프를 샀다. 김경호의 스페셜 앨범 <...LOVE U>. 김경호의 주옥같은 명곡 중에서도 '사랑'에 관한 곡만 모아놓았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앨범은 김경호와 상의 없이 당시 소속사가 마음대로 발매해서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 이내 김경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김경호의 '노래'겠다.

당시 '반가성'이라 해서 스틸 하트의 'She's gone'이 대유행이었는데, 학교에 가면 세상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친구들 천지였다. 전성기의 막바지에 있던 김경호 또한 큰 몫을 차지했었는데, 주로 '두성'을 사용하는 김경호의 창법이 맞지 않았던지 자주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반가성' 대신 '비성'을 주로 사용해, 유행과는 살짝 다른 길을 갔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박완규의 '천년의 사랑'이라든지, 주니퍼의 '하늘 끝에서 흘린 눈물'이라든지, 야다와 얀의 초고음 곡들을 원키로 곧잘 부르고 다녔는지라 김경호에 빠지는 게 어렵진 않았다.

고요함을 위한 외침, 김경호

 김경호 5집. 당시엔 테이프로 '시험기간'에만 줄기차게 들었다.

김경호 5집. 당시엔 테이프로 '시험기간'에만 줄기차게 들었다. ⓒ 김경호


문제는 김경호를 부르는 것보다 듣는 걸 너무 좋아하게 된 것이리라. <...LOVE U>에 이어 5집, <김경호 Best And Live>, 6집, 7집 테이프도 연달아 구입했는데, 그중 특히 5집을 테이프 줄 늘어지게 들었더랬다. 5집에는 김경호의 헤비메탈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곡과 김경호의 록발라드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곡이 겸비되어 있었다. 매일 주구장창 들었던 건 아니고, 잠자기 직전의 고요한 때와 '시험기간' 때만 들었다. 여기에서 김경호를 향한 나의 '덕후'적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김경호의 노래는 나에게 '고요함을 위한 외침'이었다. 이 역설적인 단어는 내 성격과 직결되는데, 평소 너무나도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나는 사실 가슴 속에 불같은 면모를 간직하고 있었던 거다. 나도 몰랐던 나의 진짜 성격을 김경호의 노래가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고등학교 내내, 대학교 내내, 성인이 되어서도 어느 때보다 고요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난 다른 누구도 아닌 김경호를 들었다.

다른 말로, '외침 속의 고요함'이랄까. 분명히 시끄럽기 짝이 없는데, 누군가는 듣고만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일 텐데, 나에게는 그것이 평온함의 중심이었다. 오만가지 생각들의 침투를 그의 외침들이 막아주고, 그 안에서 나는 온전히 내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었다. 신기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김경호'라야 했다. 그의 목소리여야만 했다. 다른 외침은 나의 오만가지 생각들의 침투를 온전히 막아줄 수 없었다.

이런 때도 있긴 있었다. 쪽지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한 거다. 당연히 고요하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친구들, 난 도저히 그 고요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구들과 얘기도 않은 채 혼자 이어폰을 끼고 공부할 순 없으니, 김경호가 아니더라도 시끄러운 외침을 들어야 했다. 난 친구들이 공부할 동안 공부할 수 없었고, 친구들이 쉬자고 해서 오락실에 갔을 때 따라가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경호가 나에게서 또 다른 면모를 불러일으켰다고 할까?

쪽팔려도, 두려워도, 긴장돼도, 김경호!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 첫 소절. 짜릿하다.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 첫 소절. 짜릿하다. ⓒ 유튜브


너무 많이 듣다보면 너무 부르고 싶게 된다. 김경호를 너무 부르고 싶었고 노래방에서 김경호를 무지하게 불렀다. 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를 '김경호'라는 별명으로 불렀을 만큼. 뿐만 이랴? 노래방이 아닌, 무대 비슷한 곳에 선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쪽팔림과 두려움과 떨림을 무릅쓰고 불렀던 노래가 김경호의 노래들이다. 다른 무난한 노래들을 불렀다면 좀 나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을 거다.

그 처음이 기억난다. 대학교 1학년 때, 음악 관련된 수업에서였다. 앞으로 나와 200여 명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르면 따로 리포트를 내거나 실기 테스트를 받지 않고도 그에 부합하는 점수를 부여하겠다고. 나는 이때다 싶어 호기롭게 앞으로 나갔고, 앞이 까매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그러곤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를 얻었다. 그럼에도 나의 김경호 사랑은 당연히 끝나지 않았다. 다음 기회를 벼르고 별렀을 뿐. 군대에서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내 18번은 김경호의 가장 유명한 곡이자 그나마 무난히 낮은(?) 음역대의 곡, 5집이 아닌 2집의 '금지된 사랑'이다. 얼마나 좋아하면 결혼식에서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제목의 이 곡을 축가로 부를 뻔하기도 했을까. 물론 가사는 금지된 사랑을 뚫고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자는, 결혼식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내용이다. 대신 무난한 걸 선택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후회하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김경호였어야 했는데.

이런 덕후도 덕후다

 김경호의 최전정기 1998년의 모습.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멋지다.

김경호의 최전정기 1998년의 모습.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멋지다. ⓒ 유튜브 화면 캡처


김경호 하면 콘서트일 텐데, 난 한 번도 김경호 콘서트를 가본 적이 없다. 팬클럽 회원도 아니고, 그에게 나의 존재를 알릴 만한 그 무엇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김경호의 모든 노래를 줄줄 꾀며 다 들어보지도 않았다. 오직 5집만을 정말 많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조용하기 짝이 없는, 왠지 센치해지는 시간이면 조용히 5집을 꺼내 감상한다. 테이프를 꺼내는 게 아니라, 핸드폰을 꺼내드는 게 다를 뿐. 더구나 유튜브로는 김경호의 라이브도 마음껏 들을 수 있으니 너무 좋다.

진정한 덕후의 덕목을 갖추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를 좋아한다기보다 '김경호'의 노래를 좋아하고 록을 좋아한다기보다 '김경호'의 록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도 가장 고요해야 하고 집중해야 할 시간에, 가장 시끄러울 게 불 보듯 뻔한 김경호의 5집만 듣는 사람이 나다.

김경호는 2003년에 성대 결절 판정을 받고 7집 활동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고생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창법이지만 요즘 많이 올라온 느낌이다. 1971년생, 올해 나이 47세. 록커로서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데뷔 30주년이 되는 2년 후를 생각하며, 제2의 전성기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엿보인다. 항상 응원한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김경호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내 안의 덕후> 공모입니다.
김경호 시험기간 5집 외침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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