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의 특성을 듬뿍 살린 공로상의 이름 '까마귀 기사상'을 받기 위해 기사 작위를 받는 장면.

영화제의 특성을 듬뿍 살린 공로상의 이름 '까마귀 기사상'을 받기 위해 기사 작위를 받는 장면.ⓒ 장혜경


2017년 4월 4일, 유럽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벨기에 브뤼셀의 종합 아트센터 보자르(BOZAR) 대극장에서 한 동양인 남자가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객석은 관객으로 꽉 차있었다.

세계 3대 장르 영화제로 꼽히는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35회를 맞았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에서 한국의 박찬욱 감독은 올해의 공로상인 '까마귀 기사상(Chevalier de l'Ordre du Corbeau 2017)'을 수상했다.

"아직 공로상을 받을 만한 연륜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상에 담긴 까마귀(유럽에서는 크고 음습하고 불길하고 사악한 이미지로 알려진 새)의 뜻을 깊이 새겨 작품에 담아내겠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분들께 보답하겠다."

오프닝 행사가 열린 대형 극장에는 박찬욱이라는 이름이 스크린 가득 펼쳐졌다. 그의 회고전에서 상영될 영화들도 영상으로 소개됐다. 뒤이어 무대로 걸어 들어오는 박찬욱 감독을 향한 관객의 환호는 열광적이었다. 기사 작위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침묵했지만 작위식이 끝난 후 그가 마이크를 잡자 모두가 일어나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박찬욱 감독이 목례로 답하자 관객들은 곧바로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박 감독은 주저 없이 그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주제곡이었던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다. 잔잔한 음률이 울려 퍼지자 들떠있던 객석의 분위기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그는 이튿날 열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현실이 떠올라서"라고 답했다.

덕후들의 영화제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선 인파들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선 인파들ⓒ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스페인의 시체스,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로 꼽힌다. 영화제의 형식이나 상영되는 영화의 특징이 뚜렷하기에 '덕후들의 영화제'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관객을 사로잡는 새로운 발상과 독특하고 혁신적인 기법과 스토리 전개 등이 눈에 띄는 작품들을 선정해 상영한다. 이 영화제 일정동안, 한국 영화는 거의 매일 볼 수 있다.

먼저 공로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박쥐>(2009),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친절한 금자씨>(2005)가 상영된다. 그리고 이수연 감독의 <해빙>, 모홍진 감독의 <널 기다리며>, 이계벽 감독의 <럭키>,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 김성훈 감독의 <터널>, 홍지영 감독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이호재 감독의 <로봇소리>, 나현 감독의 <프리즌> 등 8편의 한국 영화들을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된다.

국제 경쟁 부분에 출품된 작품은 <가려진 시간>과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두 편이며 스릴러 경쟁 부분은 <터널>, <해빙>, <프리즌> 3편의 영화가 공식 경쟁 부분에 출품되었다.

올해로 35회를 맞는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는 지금까지 장편 800여 편, 단편 1122편 등을 선보이며 꾸준히 세계무대에서 장르 영화제로써의 명성을 쌓아왔다. 이 영화제에 선정된 모든 영화 작품들은 영화제에 성격에 맞게 기준과 취향이 독특하다. 그렇기에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장르 영화 덕후들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올해는 브뤼셀시의 후원으로 브뤼셀 국제 영화마켓(Brussels International Film-BIF Market)을 영화제 기간 동안 연다. 영화 제작사, 배급사, 후원사 등이 공동 제작, 사전 제작, 기술 지원 등을 논의하는 영화 배급의 중심지로 새롭게 부상하기 위한 행사를 준비했다.

특이 이 영화제는 독특하고 환상적인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는 것으로 유명한데 올해에는 뱀파이어 무도회와 좀비 퍼레이드, 좀비 나이트를 마련했다. 판타스틱 영화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는 특수 분장의 효과를 관객들이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수 분장 대회, 좀비의 날, 탐정물의 날 등도 다채롭게 열린다.

한국 영화 역대 최다 진출... "나는 박찬욱의 광팬"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상을 받아든 박찬욱 감독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상을 받아든 박찬욱 감독ⓒ 장혜경


한국 영화의 활약도 돋보인다. 올해는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사상 가장 많은 한국 영화가 경쟁부분에 출품됐다. 이수연, 홍지영, 엄태화, 나현 감독은 영화 상영 후 언론/관객과의 질의응답을 갖는 행사도 진행한다.

현지 언론들은 박찬욱 감독의 까마귀 기사상 수상이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현지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박 감독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시네마스코프 벨기에>의 장필리포 티리아뜨 기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본 후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을 때 영화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의 영화 속 소름끼치는 장면들과 사악한 주인공을 상상하며 박 감독을 떠올렸는데 막상 만나보니 너무나도 깔끔한 외모와 신사적이고 성실한 인터뷰 응대에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이후 더더욱 박 감독의 팬이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 블로거 티보트 게르구아는 박찬욱의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노트를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불어로 쓴 빽빽한 기록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열정은 충분히 느껴졌다. 이 블로거는 박찬욱 감독과 더불어 한국 감독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이 무척 낯설었지만 점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최근에 본 영화 <아가씨>는 내용과 더불어 화면 자체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배경이 된 집, 효과, 음향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인터뷰 시간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한국 역사를 통해 일본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게르구아는 장르 영화에 심취하여 현재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다섯 개의 블로그를 운영한다.

로컬 방송 기자 안 미소튼 "35회째를 맞는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까마귀 기사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에 대한 관심은 한국 영화 전반의 관심으로 확대됐다"고 전했다. 이번에 소개되는 한국 영화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그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도 브뤼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영화제 스텝이자 박찬욱의 광팬이라고 소개한 맥심 리파트

영화제 스텝이자 박찬욱의 광팬이라고 소개한 맥심 리파트ⓒ 장혜경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스텝 맥심 리파트는 이렇게 전했다.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가진 건 박찬욱 감독 영화 <올드보이>가 인기를 끌면서 부터다. 올 해 많은 한국 영화들이 이곳에 출품되었고 상영되고 있는 것도 박찬욱 감독의 명성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까마귀 기사상은 장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의 영예를 인정하는 상이다. 그 상을 박찬욱 감독이 수상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르 영화에 관심이 많아 영화제 스텝으로 일하고 있는 나는 박찬욱 감독의 광팬이다. 그의 영화는 감독 영화는 영상, 스토리, 효과, 음향 등 다양한 부분에서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올드보이>에 나오는 배경음악을 안다. (직접 음을 흥얼거리며) 이걸 모르면 박찬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한국 영화가 선전할 수 있었던 건 힘든 역사 때문"

 인터뷰 중인 박찬욱 감독

인터뷰 중인 박찬욱 감독ⓒ 장혜경


- 박찬욱 감독이 받은 까마귀 기사상의 시상식은 무척 특별했다. 기사 작위를 받은 소감이 어떤가?
"특별히 외국 관객을 의식해서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 관객들의 열정에서 장르 영화의 힘이 있다고 느꼈다. 장르 영화는 그에 맞는 형식과 원칙이 있는데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영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 여러 나라의 다양한 영화제에 참가했고 상도 받으셨다. 특별히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다른 영화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스릴러, 호러, 판타지 등 특정 형식의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영화제이기 때문에 이른바 '덕후'들이 관객의 주류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른 영화제보다 훨씬 열정적이다. 상을 받을 때도 시상식이라기보다 파티 분위기였다. 아주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영화제다."

- 시상식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부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이 환호하며 노래를 부르라고 연호했다. 내 영화 속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원래 아는 노래가 많지 않다.(웃음)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 떠오르면서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 요즈음 유럽에서 한국 영화가 굉장히 선전하고 있다. 예전보다 상영되는 영화 편수도 많아졌고 이번 이 영화제에도 한국 영화가 11편이나 상영된다. 특별히 한국 영화가 유럽에서 선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국 현대사가 한국 사람들을 무척 고단하게 만들었다.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단련되고 성숙해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든 역사 속에서 영화인들도 작품을 만들고 성장했다. 그래서 훨씬 감성도 풍부하다. 또 시련이 표출되거나 감동이 더 해진 결과 성숙하고 정서가 깊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건까지 있었다. 역사적으로 질곡과 변곡점이 많은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감정과 에너지가 폭발하여 영화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탄핵 문제와 더불어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군사 독재 시절, 검열로 영화가 가위질 당했다. 그 때와는 다르지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적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표현의 갈망을 억압하는 정치적 행태다. 이런 행태는 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창작 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앞으로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이곳에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환호받는 이유가 뭘까?
"특별한 이유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유럽이나 외국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그들이 내 작품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를 나도 알고 싶다. 내 작품을 본 사람들의 평가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오는 16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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