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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군무원 준비생이 만나는 영상에서, 문 후보는 초면부터 반말을 사용한다. 물론 그는 시종일관 군무원을 준비하는 청년에게 따뜻하게 대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모습만큼은 실망스러웠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군무원 준비생이 만나는 영상에서, 문 후보는 초면부터 반말을 사용한다. 물론 그는 시종일관 군무원을 준비하는 청년에게 따뜻하게 대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모습만큼은 실망스러웠다.
ⓒ 딩고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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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모바일 콘텐츠 제작사의 영상에 깜짝 놀랄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다. 해당 영상에서 문 후보는 한 군무원 준비생을 찾아 그를 위로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름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좋은 콘텐츠에 출연했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시종일관 깍듯이 높임말을 했던 출연자와 달리 문재인 후보는 시작부터 그에게 반말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연장자가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말을 놓는 일이 흔하고 그래서 문 후보도 친밀감을 표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전에 양해조차 없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그의 모습은 친근감보다는 실망감을 더 크게 안겨주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언급한 영상에서처럼 두 사람의 나이가 현격한 경우에만 발생하진 않는다. 가령 내가 겪은 일이 그랬다. 하루는 학교 선배의 초대로 식사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테이블에는 처음 만나는 선배의 친구들이 가득했고, 나는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테이블에서 가장 나이가 적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발생했다.

아까는 말을 높여 나를 반겼던 분이 갑자기 '네가 여기서 막내구나, 형이랑 누나들한테 술 좀 따라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요구 자체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걸 반말로 듣자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선배가 겪을 난처함을 생각하면 뭐라 반발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나는 화를 꾹 누르고 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반말'이 전제하는 것

반말은 흔히 높임말과 대비되고 그래서 '낮춤말'로 인식되곤 한다. 실제로 이런 식의 분류법을 제시한 학자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다른 의견도 등장했다. 우리는 반말을 친구나 가까운 연장자에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청자를 낮춰보는 태도는 없다. 그래서 반말이 낮춤이 아니라 단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안 높임'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또한 기존의 분류가 화자와 청자의 대비적 위상을 기준으로 삼았다면(가령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이 우위에 있는 이에게 쓰는 말이 높임말이라는 식이다) 새 분류는 화자의 의도가 높임/안 높임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언급한 것처럼 외견상 지위 차이가 현격해 보여도 당사자들이 꼭 그 관계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말을 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말이 '낮춤말'로 작동한다. 앞서 내가 겪은 일로 다시 돌아가보자. 처음 서로의 정보를 몰랐을 때 나와 선배의 친구는 상호존대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나의 나이가 드러나고 가장 어린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에게 나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똑같이 말을 놓고 한 손으로 술을 따라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테이블이 난리가 나거나 최소한 '어린 게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즉 그는 나에게 예의를 갖추고 말할 필요가 없지만 여전히 나는 높여서 말을 해야 하는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나이에 권력을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일방적 반말 문화'가 유해한 이유 

"왜 반말이야?"
 "왜 반말이야?"
ⓒ 무한도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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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그저 신분을 이유로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단지 나이가 많거나 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가령 외국 영화에 부부인 캐릭터가 등장할 때를 생각해보자. 설정상 아내 쪽이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도, 자막에선 남편은 반말을 하고 여성만 높임말을 쓰는 사례가 허다하다.

심지어 장애 여부가 사람들의 말하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는 일전에 뇌성마비를 가진 승객을 태운 택시 기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놓고 아이를 어르듯 이야기했다는 글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그는 표현에만 어려움을 겪을 뿐 인지능력은 발병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처럼 연령·성별·장애 유무만을 이유로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스레 여겨지는 일은 전혀 옳지 않을 뿐더러 유해하기까지 하다. 권력이 불균등한 상황에는 항상 이유가 붙는데 그것이 편견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은 연장자에게 말을 높여야 하지만 어른들은 반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이들이 마땅히 보호자이자 부양자인 어른들에게 존중을 표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부여된 아동의 성질이 여성과 장애인에게로 옮겨갔기에 같은 방식의 대화가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 심지어 아이들은 가사에서 일정 부분 책임을 맡기도 하고 거꾸로 부모들이 그들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이런 사실들은 말끔하게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존중받는 것이 당연하고 어떤 이에게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대화 방식은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맥락 없는 반말은 갑질이다

따라서 권력을 재배치한다는 차원에서도 한국의 불평등한 대화 문화는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한 쪽으로 힘이 쏠린 상황이라고 해도 '상호존대'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

가령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메뉴를 선택하고 지불까지 마치고 나면 손님은 구매한 서비스를 제공 받아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점원은 자연히 을의 자리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같은 구도가 그들이 노동자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없거나 그래서 함부로 반말을 들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행동에는 이미 붙여진 좋은 이름이 있다. 바로 갑질이다.

즉 상대방의 낮은 지위만을 이유로 반말을 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갑질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가 나보다 권력이 없거나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대할 때 격식과 존중이 필요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갑질의 경우처럼 자신의 힘을 남용해 누구에게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음을 뜻할 뿐이다. 흥미롭게도 반말은 '낮춤'도 '높임'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무표성' 말로 분류된다.

말에 여전히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말은 끝에 '-요'를 붙였을 때 높임말이 되는가를 가지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 당신의 반말이 누락한 존중과 인격적 대우를 다시 갖추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다는 말이다. 간단하다. '요', 이 한 글자만 말의 뒤에 붙여 달라.


태그:#반말, #예의, #나이주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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