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라인>을 연출한 양경모 감독.

영화 <원라인>을 연출한 양경모 감독은 <하얀 돼지> <디지털 무비> 등의 중편과 단편으로 국내외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신인이다. ⓒ 이선필


지금 이 순간 TV를 켜고 채널을 돌려보자. 수 분당 한 번꼴로 만날 수 있는 광고가 있으니 바로 대부업체광고다. 저마다 저렴한 이자를 외치며 쉽고 빠른 처리를 해준다면서 대출을 권유한다. '빚 권하는 사회', 2017년 대한민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영화 <원라인>은 치열하게 그 현실의 멱살을 잡고 스크린에 끌어왔다. 임시완 진구, 그리고 연극무대와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선영, 박병은, 박종환 등이 참여했다. 일반 대부업체가 아닌 작업 대출, 그러니까 특정 재산을 담보로 목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챙기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서민 혹은 기업인을 대상으로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전문 대출꾼들이다. 영화는 이들이 서로 돕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렸다.

범죄 영화의 탈

설정만 놓고 보면 몇 영화에서 봤음직한 범죄영화의 냄새가 난다. 냄새는 나지만 뻔하진 않다. 6일 오후 합정동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경모 감독은 "'범죄영화의 탈을 썼다고 꼭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나? 관객들은 또 비슷한 영화 하나를 극장에서 보게 되는 건데 그게 과연 좋은 영화일까?' 라는 질문을 촬영 내내 되물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원라인> 속 등장인물은 저마다 밀도가 높고 사연이 있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박병은과 박종환의 캐릭터는 윽박지르고 주인공을 괴롭히고 끝나는 기능적 인물이 아닌 조금은 어수룩하면서도 욕망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입체적 인물로 묘사된다. 또, 이들의 근거지인 작업실과 비디오방 등은 모두 세트가 아닌 실제 건물들이며, 추격신 역시 직접 배우들이 뛰고 몸을 부딪치며 차를 몰고 가는 식으로 촬영했다. 그만큼 영화 곳곳에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 신인감독의 패기 덕이다.

"배우 한 명을 캐스팅 하더라도 제작사와 투자사를 설득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박병은, 박종환 배우는 석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이런 장르의 시나리오를 보면 딱 떠올릴 법한 캐릭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고 난 믿는다.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설득하고 또 설득한 거다. 그 규격화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전이긴 했다. 아마 신인 감독이라면 이런 힘든 과정을 다 겪을 것이다. 근데 스태프들과도 얘기한 게 우리가 도전하지 않으면 후배들은 더 도전하기 힘들 것이고, 그러니까 설득하자였다.

악역 캐릭터를 만들 땐 배우에게 남보다 악하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 남들보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거지. 스스로 나쁘다고 캐릭터를 해석하는 순간 과잉된 표현이 나온다. 물론 그걸 좋아할 관객도 있겠지만 <원라인>은 그런 자극보단 현실성이 중요했다. 영화를 보는 자신조차도 박 차장(박병은 분)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

영화 <원라인> 영화 <원라인> 관련 사진.

▲ 영화 <원라인> 영화 <원라인> 의 한 장면. 박 실장(박병은 분)이 작업대출 비법을 배우려는 민재(임시완 분)의 기선을 제압하고 있다. ⓒ NEW


천민자본주의

5년에 걸쳐 취재와 시나리오 작업이 이뤄졌다. 양경모 감독은 술자리에서 만난 지인에게 들은 작업대출 사기 이야기를 토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영화는 사기가 한창이던 2005년과 2006년을 배경으로 하는데 여기엔 당시 신권 지폐를 받기 위해 한국은행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받은 양 감독의 충격도 한몫했다. 금융 고위 관계자에게 정보를 받는 장 과장(진구 분)이 일련의 과정을 '예배'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감독 특유의 관점이 담긴 결과다.

"재밌는 건 지폐가 바뀐 이후 지난 12년간 그럼 한국이 과연 더 좋게 바뀌었냐는 거다. 사람들이 돈을 대하는 태도나 돈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이 더 나은 방식으로 바뀌었을까. 그때 그 은행 앞에서 돈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 천민자본주의는 이미 현상이 돼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단순한 프레임에 가둘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돈을 신처럼 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작업대출업자는 무조건 연락해서 만났다. 철저하게 취재원 보호를 하겠다고 설득하며 만났다. 저와 가까운 제작사 관계자도 제 취재원을 모른다. 그들이 돈과 은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핵심인데 그걸 파악하기가 참 힘들었다. 이 과정이 오래 걸렸고, 제도권 금융계는 지인들을 통해 확인했다. 작업대출업자는 자신들이 서민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은행 사업을 하자는 박 실장에게 장 과장이 하는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 '은행이 결국 돈에 돈을 빚에 빚을 붙이는 일을 하잖나. 한도 끝도 없이….' 이게 바로 작업대출업자가 현 은행권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 말이 맞다는 게 아니라 대출업자가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내겐 아이러니였다. 은행은 돈 받아내기 쉬운 사람을 골라서 장사하는 거고 대출업자는 선의를 갖고 (그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거라고 믿고 있다. 과연 그 선의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은행은 물론 선의를 가질 필요가 없지만 적어도 국가는 선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인 질문

 영화 <원라인> 촬영 당시 현장 모습. 배우 임시완과 양경모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영화 <원라인> 촬영 당시 현장 모습. 배우 임시완과 양경모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 미인픽쳐스



그간 금융범죄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여럿 있었지만 양경모 감독은 적어도 '오리지널리티'(독창성)면에선 부끄러울 게 없어 보였다. 시스템에서 소외된 자들, 그 틈에서 어떻게든 서로를 등쳐먹는 범죄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앞서 개봉한 <마스터>와도 비교될 여지가 있었는데 분명한 사실은 <원라인>의 기획이 보다 빨랐고, 촬영과 준비 역시 앞섰다는 점.

"일단 시나리오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이 작품을 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건 복수였다. 마지막 장면에 다소 판타지 같이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주는 장면을 넣은 건 '과연 지금의 금융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나'라는 질문에서 나온 거다. 장 과장이 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관객 분들이 함께 고민하셨으면 좋겠다. 

두 번째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현실성이다. 처음 취재할 때 대출업자가 이런 말을 했다. '4대보험이 적용되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와 내가 같은 돈을 한 달에 번다고 했을 때 과연 저금리 신용대출이 누구에게 나올까요? 감독님이 아닌 직장인 친구다. 감독님은 결국 대출 받으려면 OO머니 이런 데 가서 연 38프로 이율의 대출을 받아야 할 건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작업대출업자에게 수수료 좀 주고 3프로의 이자를 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이 <원라인>을 시작하게 한 동기 중 하나였다."

비주류로 시작한 영화감독의 길

지난했던 영화화 과정처럼 양경모 감독 역시 지금의 필모그래피를 쌓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의대생 출신으로 의사를 준비하다 문득 메스가 아닌 카메라를 잡게 됐다. 막연하게 좋아했던 영화가 삶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삼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몇 편의 중편과 단편영화로 영화제와 평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년 전 발표한 <일출>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감독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거지 내가 택할 진로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 길로 가게 됐다. 아마 처음 캠코더를 산 날이 영화를 하게 된 계기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뷰파인더로 무언가를 찍을 때 거기엔 대상을 보는 나만의 시각이 담기지 않나. 스물세 살 때 캠코더를 사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니 상점을 들락거린 날이 있었다. 의대를 다닐 때였는데 고민을 거듭하다 전 재산을 털어 그걸 샀다. 그때 가장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오히려 진로를 바꾼 건 자연스러웠지. 그 이전까진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면, 그 이후엔 영화를 찍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된 셈이다."

그렇게 산 캠코더로 제일 처음 찍은 장면은 TV를 보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양경모 감독은 "학교에서 수많은 기술을 배우고 거기에 함몰될 때면 내가 어떤 시각을 가졌고, 대상을 바라봤는지 고민하게 된다"며 "그때마다 처음, 그리고 두 번째 찍었던 장면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첫 상업영화인 <원라인>은? 양경모 감독이 답했다. "장르적 쾌감도 담겼지만,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민하며 만들었다"고. 이후 그가 어떤 작품을 보일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바라봄'에 있어서 철저히 고민하는 자세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개봉 이후 성적은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아쉽지만 양 감독은 "나만의 시각을 담으려 했다"는 말을 강조했다. 간만에 진짜 신인다운 신인 영화인을 만났다.

"인간과 사회를 긍정하진 않지만 결국 희망은 사람에게 찾을 수밖에 없다. 처음 만든 상업영화에서 감독이 원하는 대로 푼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이후엔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고민할 거 같다. 조금은 새롭고 다르게, 그러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담도록 노력할 것이다."

 영화 <원라인>을 연출한 양경모 감독.

ⓒ 이선필



원라인 임시완 대부업체 진구 양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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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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