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5월 5일 영국 런던의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아스널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첫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5일 영국 런던의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아스널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첫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 EPA/ 연합뉴스


20대 많은 남학생들은 스포츠 마케팅 혹은 스포츠 기사를 쓰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런 학생 중 한명이다. 사실 해외 축구를 좋아하는 게 '덕후'적인 느낌은 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얕게 알고 가끔 훑어볼 뿐, 매일 축구 기사를 읽을 만큼 덕후적으로 해외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우선 축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축덕'분들이 이 글을 읽고 흥분하지 않길 바란다. 축구를 잘 안다기 보다는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축덕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기사를 쓴다.

2002월드컵, 박지성 선수의 맨유 입단... 스포츠 산업의 발전

남자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2030세대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해외축구를 좋아하게 됐을까?

2002년 월드컵, 초중고등학생 대부분은 부모님이 사주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 응원에 나섰다. 기적 같은 4강 진출의 감동에 힘입어 학생들은 운동장에 나가 더욱 열심히 공을 찼다. 월드컵이 끝나자 박지성, 이영표 선수의 유럽 진출 소식이 들려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포츠 뉴스를 통해 활약 소식을 접하거나 정말 중요한 챔피언스리그 경기만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2005년 7월 박지성 선수가 유럽 최고 강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 엄청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매스컴은 다투어 맨유가 어떤 팀인지 설명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역사와 위상, 진행 방식을 알려주었다. 박지성 선수의 맨유 입단은 운동을 좋아하는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그런 대중들의 기대를 눈치채고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이 한국에 들어왔고, 투박한 스코어보드와 자막 그리고 지금 보면 다소 민망한 화질과 함께 프리미어리그의 TV 중계가 시작됐다.

유럽 축구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는 반 유니폼을 해외 축구팀 유니폼으로 맞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축구 온라인 게임도 유행했다. 유럽 축구를 중계하는 채널들이 늘어났고, 해외 축구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인터넷 매체도 늘어났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메시와 호날두를 놓고 누가 더 잘하는지 심하게 언쟁을 벌이게 됐고 해외 축구 선수들 트위터에 욕을 하기도 한다. 또 라이벌 팀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등 다소 과격할 정도로 해외 축구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렇게 박지성 선수의 맨유 입단은 단순한 한 개인의 입단이 아니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남성들의 취미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우리나라 스포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끊을 수 없는 축구의 유혹, 하지만 친목의 수단

 2007년 7월 20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퍼거슨 감독과 박지성이 20일 서울 상암월드컵구장에서 열리는 맨유와 서울FC의 친선경기에 앞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고 경기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2007년 7월 20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퍼거슨 감독과 박지성이 20일 서울 상암월드컵구장에서 열리는 맨유와 서울FC의 친선경기에 앞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고 경기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축구에 대한 나의 애정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 입단하면서 내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은 '해외 축구 인터넷 기사 구독'이 차지했다. 매일 올라오는 축구 경기 소식은 물론 과거에 유명했던 선수들이나 축구 사건을 마구잡이로 읽어댔다. 그런 습관은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켤 수 없는 날을 빼놓고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구단인 토트넘에 대한 사랑 또한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영표 선수가 활약했고, 로비 킨, 베르바토프를 중심으로 프리미어리그 빅4(첼시, 아스날, 리버풀, 맨유)의 자리를 위협하던 토트넘. 지금은 손흥민 선수가 입단해 국내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더 높혔다. 많은 친구들이 맨유 팬일 때 나 혼자 토트넘 팬이었다. 지금은 그런 마니아적인 느낌이 없어진 것 같아 씁쓸한 감도 있다.

그 시절, 남자애들끼리 처음 대화할 때 빠지지 않았던 질문이 어느 해외 축구팀을 좋아하는가였다. 아이들이 축구 이야기하다가 논쟁이 붙어서 내용을 확인하고 싶을 땐 꼭 나를 찾아왔다.

수학 공식, 한자는 죽어도 안 외워지는데 어려운 선수들 이름은 어쩜 그리 잘 외워지는지 한번 보면 절대 까먹지 않았다. 축구 게임을 할 때도 친구들은 나에게 어떤 선수가 잘하는지 물어봤고 자신이 쓰는 게임 속 축구 선수가 실제로 어떤지 물어봤다. 친구들이 축구에 대해 나에게 가장 먼저 물어봐주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다. 축구에 대한 자부심은 학창 시절 내 자존감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어떤 선수가 좋은지 물어봤고, 자신이 쓰고 있는 선수가 실제로는 어떤 선수인지 물어봤다. 친구들이 축구에 대해 나에게 가장 먼저 물어봐주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었고, 축구 정보에 대한 지식은 학창 시절 내 자존감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나 군대처럼 자존심 싸움이 강한 남자 집단에서도 축구 지식은 큰 도움이 됐다. 특히 군대에서는 사이가 나쁜 선임과의 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입대가 불과 한 달 차이였는데 10개월이 넘게 나쁜 관계가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임과 축구를 같이 보게 됐다. 그러다가 축구를 잘 알던 선임과 서서히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웬만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데포르티보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발레론 선수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간의 깊었던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다음 날부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축구는 만국의 공통어가 되기도 했다. 우연히 외국인 친구들이 축구를 하는 광경을 보고 같이 축구를 하게 됐다.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특별한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슈팅이 강하고 패스를 잘하는 친구에게는 '제라드'라고, 말랐지만 개인기를 잘하고 빠른 친구에게는 '네이마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별명을 붙여주고 축구를 하다 보니 금세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수 있었다.

덕후적인 축구 사랑 때문에 곤란했던 적도 많았다. 공부를 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해외 스포츠 기사를 읽는 것이었다. 수학 문제를 몇 개 풀고 나서는 새로 나온 기사는 없는지 궁금해 다시 눈길이 갔다.

수능 일주일 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2주 전까지 축구도 다 챙겨보고 축구 게임도 조금씩 했기 때문에 수능 일주일 전 주말은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가 주말 밤에 시작한 것이다. 공부에 집중하려 했지만 도저히 샤프가 손에 잡히지 않아 결국 티브이를 켰다. 축구 경기가 끝나고 게임도 몇 판 했다. 다행히도 수능을 잘 봤다. 그때 축구 경기를 보고 게임을 한 게 스트레스를 풀어주었다고 합리화하긴 했지만, 수능을 못 봤다면 두고두고 맘에 걸렸을 것이다.

그저 취미로 생각하던 축구는 나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학에 가고 군대를 갔다온 후에도 나의 진로는 막막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축구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축구 기사를 써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몸이 찌릿했다. 어려서부터 봐온 내공이 있엇는지 기사는 술술 잘 써졌다. 현재 스포츠는 내 진로 1순위다. 다음 학기에는 중국으로 넘어간다. 최근 '황사 머니'로 전 세계 축구판을 뒤흔들고 있는 중국의 축구 산업을 직접 눈으로 볼 생각이다.

박지성 선수의 유럽 축구 커리어와 함께 성장한 우리는 어느덧 20대, 30대가 되어 스포츠 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댓글을 남기는 축덕들,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으면 참신한 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진로까지 결정하는 사람들, 우린 모두 '박지성 세대'다.

지금 학생들은 손흥민, 기성용 선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뛰어난 선수들이 계속 배출되면서 새로운 'OOO 세대'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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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내안의 덕후
박지성 스포츠 해외축구 내안의 덕후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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