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영화를 보면 영화계에도 페미니즘 바람이 분 것 같다. 물론 많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다수관을 차지하는 한국 영화를 보면 '한국 사회는 정말 남자로만 이뤄지나'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최소한 해외 영화들을 보면 꾸준히 페미니즘 관점에서 읽힐 수 있는 서사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지난 3월 25일 개봉한 <히든 피겨스>는 일종의 영화 페미니즘 붐을 증명하는 듯하다. 백인 남성들의 성과로 여겨지던 NASA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영화는 현재 꾸준히 입소문을 타며 상영되고 있다.

<히든 피겨스>에서 좋았던 점은 단연 인종 문제와 젠더 문제를 함께 다뤄냈다는 점이다. 이는 인종 문제에서의 기본값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왔다는 비판과 젠더, 특히 여성 인권 문제에서의 기본값이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 설정되어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흑인 여성 셋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는 어떤 롤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쉬운 점도 많았다. 우선 당장 한국에서의 포스터가 그러하다. <히든 피겨스>의 포스터 카피를 보자.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다고 적었지만,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다고 적었다. 사실 '남녀'라는 표기법은 오늘날 양성 평등이라는 단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이다. 이분화 된 성에서 남성을 굳이 먼저 표기한다는 점이고, 성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치 인종이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히든 피겨스>에서 그려지고 있는 성은 얼핏 보기에는 시스젠더 남성과 시스젠더 여성들이다. 그들은 정확히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남성성'과 '여성성'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시스젠더 이외의 다른 성들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굳이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남녀라는 성 이분법으로 환원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던가. 혹시 정말로 성은 남성과 여성만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심과 비판은, 가장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포스터에 영화의 주제를 축소시킬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한국 배급사가 안고 가야 할 숙제이다.

 히든 피겨스

히든 피겨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과한 국가발전주의

<히든 피겨스>에 대해, 한 지인은 미국인들 나사 뽕은 어쩔 수 없다니까.'라고 말했다.

지인의 말마따나, 미국 영화의 '나사 뽕'은 과했다. 미국 버전의 '국뽕' 영화를 본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싶을 정도로. 물론 영화의 배경에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국가와 이념으로 날이 서있던 냉전 시대 아닌가. 하지만 최소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 관객에게 <히든 피겨스>의 국가의 발전에 대해 논하는 과정은 조금 과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또한 사회 내에 만연해있는 차별이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가 마치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처럼 읽을 여지를 준다. 물론 이 전략은 효과적이다. 차별 때문에 훌륭한 인재가 발견되지 못하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없다니. 그러기 때문에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라도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니. 얼마나 효과적인 전략인가. 이는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인권적인 측면에선 그다지 올바르진 못하다. 차별이 극복되어야 하는 것, 즉 인권의 문제는 당연한 문제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히든 피겨스>에서 느껴질 수 있는 교훈은,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과한 이성애 연애주의

이 영화를 보고 제일 의문이었던 점은 캐서린 존슨이 연애를 성공했고, 결혼까지 성공했다는 게 왜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등장해야 하는지다. 엔딩에서는 캐서린 존슨과 로시 본, 메리 잭슨이 <히든 피겨스>에서 다뤄진 생애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문장으로 정리해서 보여준다. 그들은 각자 NASA에서 자신들의 마이너리티를 천재성으로 극복했고, 어떤 역사가 됐다.

물론 캐서린 존슨이 연애에 성공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드라마로써 의미가 있다. 그녀의 아름다운 삶 그 자체를 위해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극복해낸 소수자성과 이 서사 속에서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아니'다. 왜 그녀의 삶을 기억할 때 천재성과 함께 그녀의 결혼생활을 기억해야 하나. 왜 굳이 서사의 집중도를 세 흑인 여성 인물에서 그 중 한 여성과 결혼한 남성 인물로까지 확장해야 했는가. 그리고 왜 <히든 피겨스>는 그것을 조장하려는 것처럼 이 영화의 엔딩에 제시해줬어야 하는가? 심지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연애를 그리 깊게 다뤄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천재성, 그 양날의 검

<히든 피겨스>는 물론 천재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천재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천재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히든 피겨스>는 그 천재들이 겪는 고난을 천재 개개인들이 가진 소수자성에서 찾았다. 물론 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큰 한계를 지닌다.

예를 들면 극 중 메리 잭슨은 흑인 인권 운동을 하는 남편에게 슬로건만이 인생의 답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조금 고지식한, 소위 '운동권'이기 때문이다. 둘은 이 때문에 싸우지만, 결국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그녀의 남편은 메리에게 펜을 주며 그 삶 자체가 투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보인다.

만약 메리 잭슨이 천재가 아니었더라면, 이 장면은 더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여성, 퀴어, 장애인, 유색인종, 빈민 등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투쟁이라니, 얼마나 의미 있는 말인가. 문제는 메리 잭슨이 천재라는 점이다. 이는 기득권이거나 혹은 현재 존재하는 차별에 둔감한 관객들에게 다른 감상을 심어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소수자성을 지녀도 그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이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의 교훈으로 말이다.

물론 <히든 피겨스>의 세 인물이 정말 탁월하고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에 차별을 이겨낼 수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구적인 그녀들 덕에 나사 내 많은 흑인과 여성들은 조금 더 나은 업무 환경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 같은 이야기는 지구 전반의 차별을 겪는 사람들에 비해 극히 소수다. 이는 메리 잭슨의 남편의 캐릭터와도 맞닿아 '너희 그렇게 투쟁해봤자 아무 의미 없어. 그럴 시간에 너희 능력이나 쌓아. 너희 능력이 못 미쳐서 차별을 당하는 거라니까' 식으로의 전형적인 기득권의 입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는 그 소수자성을 지닌 개인들의 소수자성을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 채,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합리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입장은 또한 그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기득권이 허락해준 투쟁만을 기록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연설처럼 말이다. 실제로 이 세상엔, 흑인 인권이 'I have a dream'와 같은 연설만으로 향상됐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또 위와 같은 입장은 소수자들에게만 더 강한 역량을 요구하는 풍토를 낳게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간과했을 수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나사에서 일할 정도로 천재였지만, 나사는 철저히 백인 중심적이었던 사회였다. 그 중에도 가장 천재적인 캐서린이 등장하고 나서야 유색인종 화장실은 없어졌다. 천재성은 소수자의 인권 향상에 일부 도움이 되긴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정도의 천재성은 보통 천재성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린 모두 천재가 아니지 않나.

어떤 희망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의미는 있다. <히든 피겨스>의 의의는 우리가 왜 위인전을 읽는지와 맞닿아 있다. 이 세상은 천재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왜 많은 천재들이 아닌 '우리들'은 위인전을 읽는가. 롤 모델을 얻기 위해서다. 유색 인종으로 분류되는 한국인에게, 사회에서 여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많은 소수자들에게는 롤 모델이 없었다. 많은 여성 과학자들은 기록되지도 못했다. 이는 '여자는 과학을 못해' 따위의 성차별 의식을 낳으며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화를 확고히 하는 역할로 작용하기도 했다.

<히든 피겨스>는 어쨌든 흑인 여성의 수학자, 엔지니어 등을 보여줬다. 역사에서 거의 기록되지 않았던 존재들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을 파급력이 좋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줬다. 적어도 <히든 피겨스>를 보고 난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델을 새로이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히든 피겨스>는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서사다. 아쉬움은 많았지만, 그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이 서사가 가진 의미는 크다. 적어도 노력한 티가 많이 나던 영화였다. <히든 피겨스>는 관객들을 넘어 앞으로의 영화계에 일종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그러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더 많은 소수자들의 이야기들이 드러나기를. 그들이 천재가 아니더라도 정말 평범한 인간들일지라도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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