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엄한 시간의 심판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고전명화를 영화관 스크린 위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재개봉 영화가 4월에도 여러편 찾아온다. 칼라필름 시대에 흑백영화가 그랬듯, 디지털 촬영이 세를 넓혀가는 요즘엔 구식 필름영화가 주는 감흥이 색다르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최근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을 갖춘 작품들이 줄줄이 개봉하니 만큼 관심이 있는 관객은 극장을 찾으면 되겠다.

3월 한 달 가장 흥행한 재개봉 영화는 1993년작 <델마와 루이스>로 7000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일부 재개봉작 가운데서는 첫 개봉 당시보다 더욱 큰 흥행을 한 작품도 적지 않다. 대형 멀티플렉스가 지원하는 몇몇 작품은 올해 초 재개봉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그랬듯 수만관객 동원까지도 내다보고 있다.

4월엔 어떤 재개봉작이 새로운 관객과 만나게 될까. 잎새달 재개봉작 4편을 가려뽑아 소개한다.

[하나] <미션>

미션 롤랑 조페의 <미션>의 유명한 장면.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가브리엘이 원주민들과의 첫 대면에서 오보에로 넬라 판타지아를 연주하고 있다.

▲ 미션 롤랑 조페의 <미션>의 유명한 장면.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가브리엘이 원주민들과의 첫 대면에서 오보에로 넬라 판타지아를 연주하고 있다. ⓒ (주)피터팬픽쳐스


2010년 KBS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불리며 유명해진 곡 넬라 판타지아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기쁜 소식이다. 이 곡이 가장 멋스럽게 삽입된 영화 <미션>이 6일 재개봉하는 것. 제작된 지 30년이 넘은 고전이지만 여전히 퇴색되지 않는 가치를 지닌 명작으로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재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하던 18세기 무렵이다. 영화는 남아메리카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원주민들의 삶이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을 그려냈다. 영국 출신의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롤랑 조페는 이 영화로 1986년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예수회는 18세기 경 가톨릭의 자생적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한 혁신적 종파다. 그들은 가톨릭적 질서에서 완전히 독립한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 질서 내부에서의 점진적 변혁을 추구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 같은 특성 탓에 젊고 열정적인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는데 영화는 이들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모습과 대조적으로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아래 신념과 열정을 잃어버린 추기경을 주요한 인물로 부각시켜 등장시킨다. 선교사들의 순수한 신념이 세속적인 힘의 논리 아래 짓밟히는 가운데 원주민과 선교사들이 이룩한 곱고 귀한 가치들이 무너지는 과정이 무척이나 파괴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선교사 가브리엘과 멘도사를 통해 신념을 온 몸으로 지켜나가는 용감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불의에 맞서 투쟁하기를 선택한 멘도사와 끝까지 사랑을 말하던 가브리엘, 두 아름다운 영혼이 끝내 피를 뿌리며 바닥에 거꾸러졌을지라도 나는 그들이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영혼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근래 개봉한 마블 히어로물을 통해 익숙한 관객도 있겠지만 <미션>은 당시로선 예외적으로 엔딩 크레딧 뒤에 서비스컷을 마련하고 있는 작품이다. 단 몇초에 불과한 잠시잠깐의 장면이지만 이를 통해 영화는 한 줄기 희망을 심어낸다.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멜 깁슨에게 명감독이란 칭호를 안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의 고난기를 그대로 영화에 담아내 세계적 흥행을 기록했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멜 깁슨에게 명감독이란 칭호를 안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의 고난기를 그대로 영화에 담아내 세계적 흥행을 기록했다. ⓒ (주)이수 C&E


살벌한 전쟁의 장 가운데 예수의 재림을 그려낸 <핵소 고지> 개봉과 맞물려 감독 멜 깁슨의 종교관이 보다 노골적으로 반영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재개봉한다. 2004년 개봉당시 일부 개신교 신자로부터 성모를 신격화하고 성경을 왜곡한다며 상영금지를 요구받았고 무신론자로부터는 예수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며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감 넘치는 연출과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그보다 많은 호평을 받아냈고 흥행 면에서도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전 세계적 성공을 거뒀다. <브레이브 하트>와 <아포칼립토> 등 많은 영화가 있겠으나 감독 멜 깁슨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그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영화를 택할 것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그리지 않는다. 그저 그가 어떻게 고통받았고 어떻게 죽어가느냐를 피튀기는 영상 가운데 처절하게 잡아낼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예수의 삶이 묻어나온다. 관객은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을 통해 그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갔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멜 깁슨은 이 영화를 선구적 영혼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핍박받는 한 편의 수난기로 연출했다. 앎을 설파하고 유대민족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려던 한 명의 선지자가 지배세력에 영합하는 유대의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고통받다 끝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는 비극적 수난기다.

다만 예수가 받는 고난 사이에 그를 신격화하는 장면을 삽입해 인간으로의 예수보다는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의 예수를 표현하려 한 부분이 일부 관객에게 거슬릴 수도 있을 듯하다. 한 사나이가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어려움에 맞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는가 하는 감동적인 드라마만을 기대했다면 노골적인 종교색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한 건 멜 깁슨 만큼 자신의 종교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혁신을 거듭하는 영화인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 <핵소 고지>에서 내보인 멜 깁슨의 색채를 보다 깊이 알고 싶다면 이 영화만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13일 재개봉.

[셋]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년 국내개봉 당시 불륜 논란에 휩싸이며 흥행에 실패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호흡을 맞췄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년 국내개봉 당시 불륜 논란에 휩싸이며 흥행에 실패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호흡을 맞췄다.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피천득 <인연> 중에서

혹자는 불륜을 미화하는 영화라고 한다. 다른 누군가는 한 편의 사랑영화라고 말한다. 영화가 처음 개봉한 1995년 당시엔 양측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으나 그로부터 20년 넘게 흐른 오늘에 이르러 후자가 더욱 힘을 얻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시대를 앞서 개봉한 영화임에 분명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연출과 주연을 맡고 상대역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히는 메릴 스트립이 출연했다. 이들은 깊이 있고 섬세한 연기력으로 메마른 바람이 부는 아이오와 한복판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금지된 사랑을 표현해낸다.

잡지표지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 아이오와주 작은 마을 매디슨 카운티를 찾은 사진작가 로버트. 초행길에 길을 잃고 헤매던 그의 앞에 맨발의 여인 프란체스카가 나타난다. 아들, 딸 두 아이의 엄마이자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의 부탁에 차에 올라 길을 알려주고 둘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다.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차츰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둘. 하지만 떠나야 하는 로버트와 떠날 수 없는 프란체스카 사이엔 쉽게 건널 수 없는 강이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만찬에서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전에는 단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그런 단어로. 이런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거라고, 그래서 당신이 나를 따라 나섰으면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에게 프란체스카는 아들과 딸에 대한 책임과 함께, 그를 따라나서면 다시 둘의 감정이 변할 거라고 답한다.

둘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과 책임,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꼽는 걸출한 멜로드라마 가운데 한 편이다.

원작 작가 제임스 월러가 향년 77세를 일기로 지난 10일 세상을 떠난 가운데 4월 중 극장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옥주현이 주연하는 뮤지컬도 내달 4월 15일부터 한국에 첫 선을 보인다.

[넷] <클로저>

클로저 재개봉 포스터

▲ 클로저 재개봉 포스터 ⓒ (주)퍼스트런


재개봉영화 가운데 흥행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장르는 누가 뭐래도 로맨스다. 첫 개봉 당시 못지않은 화제를 뿌리며 세월을 잊은 흥행을 이어간 <노트북>과 <이터널선샤인>, <500일의 썸머> 모두가 로맨스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일 재개봉하는 <클로저> 역시 유명한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로 입소문을 타고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나탈리 포트만과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까지 한국에서도 폭넓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영국 극작가 패트릭 마버의 연극이 원작으로 1997년 초연 이래 전 세계 50여개국에 수출됐을 만큼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졸업>으로 유명한 마이크 니콜스가 2004년 영화로 연출해 역시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한국에선 <특종: 량첸살인기>의 노덕 감독이 연출을 맡아 배성우, 박소담 등이 주연한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클로저>의 힘은 전 세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네 남녀의 서로 다른 상황과 성격에 맞춰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과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보기 위해 20일 극장을 찾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클로저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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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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