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이 인기를 얻으면서 우리 드라마에도 많은 살인마가 등장했다. 하지만 <보이스> 모태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야말로 '역대급' 악역. 이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악마도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섹시하고 아름다운 악마도 없었다.

27일 서울 강남구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김재욱은 모태구의 서늘함과 우아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하지만 모태구와 다르게, 그는 잘 웃었다. 모태구의 섬뜩하고 소름 돋는 웃음이 아니라, 유쾌하고 시원하게. 왠지 시니컬하고 4차원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모두 부서졌다.

모태구,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났다

 2017년 3월, 배우 김재욱 <보이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직접 만난 김재욱은 모태구의 서늘함과 우아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하지만 모태구와 다르게, 그는 잘 웃었다. 모태구의 섬뜩하고 소름 돋는 웃음이 아니라, 유쾌하고 시원하게. ⓒ 더좋은ENT


2002년 MBC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브라운관에 데뷔한 김재욱은, MBC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꽃미남 웨이터 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고, 때로는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재발견만 10년째"라고 자조할 만큼 '배우'로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남기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차곡차곡 꾸준히 쌓아 올린 잠재력은 어디로 흩어지지 않았고, 드디어 터졌다. 김재욱은 자신의 포텐을 터트려준 모태구를 "오래 기다린 친구"라고 표현했다.

"데뷔해 지금까지 여러 역할을 경험해봤어요. 하지만 여전히 대중분들이 제게 갖고 계시는 진한 이미지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 인식들이 제 연기활동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어요. 점점 하고 싶은 역할, 흥미가 가는 캐릭터 선택에도 제한이 생기게 됐죠.

억지로 무언가를 확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제 힘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운명적으로 (그런 기회가) 다가올 거라고 믿었어요. 사실 진득하게 기다리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죠. 모태구는, 그렇게 기다리다 만난 캐릭터였어요."


모태구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런 희대의 악역을 두고 많은 이들이 '우아하다', '섹시하다'는 극찬을 쏟아냈다. 마진원 작가가 처음부터 '우아하고 고급스러웠으면 좋겠다'고 했다더니, 그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셈이다. 김재욱 역시 외형적으로도 빈틈없고 칼 같은 모습을 가져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단다.

"겉모습만으로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건드리거나 굴복시킬 수 없겠다'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었어요. 헤어스타일, 표정, 패션... 모든 것에서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때 태구가 얼마나 치밀한지 잘 표현이 돼야, 살인 본능에 충실할 때와 차이가 두드러질 테니까요. 그 갭이 시청자분들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죠."

섹시함, 의도하진 않았다

 2017년 3월, 배우 김재욱 <보이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김재욱은 <보이스>에서 잔인한 살인마 모태구를 연기했다. '역대급'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할만큼 잔혹하고 끔찍한 악역이었으나, 시청자들은 '섹시하다'며 열광했다. ⓒ 더좋은ENT


모태구에게 쏟아진 세간의 '섹시하다'는 평가를 이야기하며, 그 섹시함의 원천이 모태구라는 캐릭터의 설정 덕분인지, 뭘 연기해도 섹시한 배우 김재욱의 매력 덕분인지 물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태구를 연기해서 나온 평가인 것 같아요. '섹시하게 해야지' 하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어떻게 하면 모태구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그런 흐름이 나온 것 같아요. 꼭 미움만 주고,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인물만 악인은 아니잖아요. 악인이지만 오묘하게 끌리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는 했어요. 결론적으로 그런 평가는 너무 듣기 좋았습니다. (웃음)"

 배우 김재욱 <보이스> 스틸 사진

배우 김재욱의 <보이스> 출연 장면. 악역을 맡은 그에게 이토록 많은 관심이 쏟아진 건, 그만의 캐릭터 소화법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 tvN

모태구는 말 그대로 '악인'이다. 그의 살인에는 동기도, 사연도 없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뒤, 내재된 사이코패스의 본성이 깨어나고, 이후 살인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살인마'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이코패스 본성을 깨웠다는 죄책감에 아들의 살육 행위를 방조하고, 마음껏 살인 욕구를 풀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한다. 최근 브라운관을 채웠던 여타 사이코패스 캐릭터들과도 선을 달리한다. 모태구의 살인 동기는 그저 쾌락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는, 극 안에서 그 인물이 되어 살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캐릭터가 아무리 대중들에게 욕을 먹고 이해받지 못하는 캐릭터라 해도, 그 인물이 되어야 하는 배우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악한 캐릭터라도 그 인물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고, 배우는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가며 캐릭터의 개연성을 찾아 나간다. 하지만 모태구는,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인물. 김재욱은 모태구를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했다.

"어렵죠. 이런 극단적인 인물에 대해 접근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극 중 살인 연기를 하면서 죄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건 마지막에 대식이를(백성현 분) 죽이려할 때였어요. 그때는 딱히 감정의 동요도 없었고, 손도 떨리지 않았어요. 그때 비로소 모태구가 체화된 기분이 들었죠."

배우가 캐릭터에 체화됐다는데, 이토록 무서운 말이 또 있을까 싶었다. 모태구는 그럴 만한 캐릭터였으니까. 사실 김재욱은 딱히 누군가를 깊게 미워해본 적도, 증오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 그이니만큼, 비록 연기지만 폭력성에 익숙해진 자신을 보면서 당혹스럽진 않았을까?

"사실 연기를 하면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어요. 15~16회를 찍었던 일주일은, 정말 살면서 이렇게 집중했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몰입해 찍었거든요. 근데 끝나고 나니 오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인터뷰를 못 했죠."

통상 배우들은 드라마를 마치면 '종영 인터뷰'라는 것을 한다. <보이스>로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받았으니, 김재욱도 당연 인터뷰를 하리라 생각했지만, 김재욱은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이번 인터뷰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가, 갑작스럽게 확정된 것이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모태구 죽음... "시원했다"

 2017년 3월, 배우 김재욱 <보이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해석이 분분했던 모태구의 죽음. 김재욱은 "환상처럼 해석될 수 있지만, 모태구는 분명 죽었다"면서, "모태구의 비극적 결말이 시원했다"고 말했다. ⓒ 더좋은ENT


모태구의 악행을 연기하며, 누구보다 힘들었을 그는, 모태구의 비극적 결말에 속 시원함을 느꼈단다. 그는 연기하는 내내 "이 친구의 끝이, 모두가 시원할 수 있도록 통쾌하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경찰에게 잡히는 걸로 끝난다면, 그거야말로 태구의 승리 아닐까요? 보시는 분들도, 순간 시원할지라도 찜찜하셨을 것 같아요. 환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찍기는 했지만, 분명한 결말을 냈다고 생각해요. 더 큰 악으로 인해 이 친구가 완전히 처참하게 뭉개지는 것. 악의 끊임없는 순환 같은 거죠."

배우들은 작품을 하나하나 마칠 때마다, 하나씩 배우는 게 있다고 한다. 타인이 되어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가 모태구로 살며 배운 건, "사람은 언제나 오만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지위나 그가 가진 가능성, 성향을 떠나, 자기가 천하무적이고 신이고, 어떤 일을 해도 세상이 용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이 없어지고 사람이 진짜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 TV에서 많이 봤잖아요. 모태구를 연기하는 데, 그런 분들 도움이 많이 됐죠.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에너지겠구나 뭐 이런 거요. (웃음)"

<보이스>가 방영되던 시기, 월화에는 <피고인> 차민호(엄기준 분)가, 수목에는 <미씽나인> 최태호(최태준 분)가 각자의 세계에서 '사이코패스' 악역을 연기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니, 묘한 경쟁심이 들었을 법도 하다. 촬영에 바빠 다른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들의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김재욱은 "OCN이라는 채널의 수혜를 받은 것뿐"이라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잔인함이나 비주얼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무래도 여러 제약이 있는 지상파 채널과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OCN이라는 채널이 가진 장점의 혜택을 받은 거죠. 지금껏 우리 드라마에 없었던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자 하는 제작진의 욕심과 의지가 강했고, 저는 그 수혜를 받은 것 뿐이에요. 연기력이나 그런 부분은 논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궁금한 배우 되고 싶다

 2017년 3월, 배우 김재욱 <보이스> 종영 인터뷰 제공 사진.

김재욱은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이 아니라도, 이제 많은 대중들은 그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 더좋은ENT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겉모습, 나른한 말투와 표정. 김재욱이 가진 분위기는 분명 동년배 배우들에게는 없는, 그만의 독특한 것이다. 때문에 <커피프린스 1호점>의 대박 이후, <서양골동양과자점-앤티크> <두 개의 연애> <덕혜옹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지만, 많은 이들이 '비슷한 캐릭터들을 맡는다'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인터뷰 초반 언급한 "대중들이 내게 갖고 있는 진한 이미지"라는 것도 여기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김재욱은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이 아니라도, 이제 많은 대중들은 그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모태구를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배우 김재욱'이 가진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택하고, 다음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지고 기대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치명적인 매력의 악역을 선보인 만큼, 그가 보여줄 또 다른 악역이 궁금하면서도, 모태구의 짙은 잔상이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차기작에 대한 고민도 깊을 것이다. "앞으로 악역을 맡게 되면 모태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라고 묻자, "그런 고민은 다음 작품이 정해지면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답했다.

"행위가 같은 건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이유와 목적이 모태구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다만 연기하는 제 입장이 아니라, 보시는 분들 입장에서 고민해야겠죠. 어떻게 하면 모태구 오버랩 없이 새로운 캐릭터로 보여드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요. 그건 그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제가 이 작품에 배우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이 캐릭터가 왜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인지를 고민해요. 저는 그런 작품을 만나 성심성의껏 연기하고 싶을 뿐이죠.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잖아요. 저 역시 그래요. 영화를 통해 배운 게 정말 많고, 제 인생에 미친 영향도 엄청나죠. 그래서 저도 그렇게, 사람들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김재욱 보이스 모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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