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고발을 하는 방송작가들이 스스로 자신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스스로 날갯짓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소름 끼쳤다.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참고 일을 한들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나. 작가들에게 당신들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28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서 열린 '방송작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회'(국민의당 이상돈). 토론회 발언 도중 이향림 작가는 말을 끝맺다 말고 울먹였다. 방송작가의 현실을 조망하는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린 건 이번이 최초다.

'작가'가 아닌 '잡가'... 항의할 곳도 없었다

 28일 국회의원회관서 '막내작가, 24시간이 모자라 - 방송작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회'(국민의당 이상돈 의원실 주최)가 열렸다.

28일 국회의원회관서 '막내작가, 24시간이 모자라 - 방송작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회'(국민의당 이상돈 의원실 주최)가 열렸다. ⓒ 유지영


10년이 지나도 오르지 않는 100만 원 전후의 임금, 그마저도 빈번한 체납 경험, 잠잘 시간조차 없는 과도한 업무시간,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쓰인 적 없는 근로계약서, 여기에 수반된 인격 모독까지 방송작가의 노동환경은 위험 수준에 다다랐다.

"육체적·정신적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커녕 늘 일용직노동자라는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계형 작가들에게 과연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을까요?" (30대, 경력6년 예능작가)

이들은 묻는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비추는 방송작가들이 정작 그 어두운 단면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러니. 하지만 이들은 방송 원고 속에서 불합리를 말할지언정 본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 말 못하고 일함! 왜? 잘못 말하면 이 바닥에서 매장되니까." (40대, 경력 16년 구성작가)

2016년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노동인권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624명 중 93.4%의 작가들이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을 한다. 그들의 노동은 프로그램 뒤 크레디트에 따라붙는 이름 한 줄로 증명될 뿐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프로그램이 결방된다는 이유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폐지되면 폐지 되는 대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런 현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불합리한 노동환경 속에서 차별도 싹튼다. 많은 방송작가는 성폭력(41.1%)을 비롯해 인격 무시 관련 발언을 들은 경험(82.8%)이 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보고해야 하고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어 굶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시당합니다. 전 그냥 방송작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20대, 경력 3개월 시사/보도 작가)

방송작가들은 '작가'가 아닌 '잡가'(잡다한 일을 하는 작가) 취급을 받으면서 업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쓰기도 한다. "메인 작가 자녀의 숙제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20대, 경력 4년)라거나 "밤 여덟시에 할 일을 끝내고 집에 가려 해도 팀장이 '너 할 일 없나 보다'하며 눈치를 줍니다. '너희는 대우 좋은 거'라며 '나 할 때는 이랬어' 등등의 말로 강제적인 합리화를 시켰습니다"(20대, 경력 2년 시사/보도 작가)는 경험담도 나온다.

"제발 기본만 해줬으면..."

 방송작가들이 일하는 현장은 화려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부조리했다.

방송작가들이 일하는 현장은 화려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부조리했다. ⓒ 픽사베이


토론회에서는 방송작가의 이런 현실을 공유하고 법적인 행정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향림 작가는 <오마이뉴스>에 "이번 토론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방송작가의 현실을 알리고 대선 이후 법제화를 위한 해결 모색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 조사 등 준비모임을 가졌던 '방송작가유니온'은, 오는 5월 이후 정식으로 출범할 계획이다.

<오마이뉴스> 취재에 따르면 인기리에 방송 중인 모 요리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작가에 임금 대신 백화점 상품권을 지급하는 등 엄연한 기만이 이어지고 있다. 방송작가노조에서는 계약서나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먼저 제정할 예정이다.

그간 방송작가들은 '프리랜서'라는 이유에서 제대로 법적인 행정적인 보호를 받기가 어려웠다. 이날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안병호 위원장은 방송작가가 '프리랜서'나 '특수고용 노동자'로 분류되는 인식을 꼬집었다.

"영화든 방송이든 문화예술이든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이 일하는 거다. '좋아서 시작한 것'의 결과가 저임금에 잠을 자는 시간 자체를 포기할 정도라기에는 그 현실이 가혹하다."

안 위원장은 또 2011년 이후 영화산업 표준근로계약서가 만들어진 이후 현장에 달라진 분위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2016년 상반기에 개봉한 상업영화(100개 이상 개봉관 확보하는 극영화) 중 46%의 확률로 표준근로계약서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이 공론화를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중소 배급·투자사들도 '근로계약'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접근하고 있다. 시급으로 계산했을 때 600원을 받던 영화 스태프들도 근로계약을 하면서 200만 원 이상을 기본으로 받게 됐다. 방송사들도 이제 책임을 가져야 하지 않나 싶다. 일단 최저임금이라도 적용이 되면 문화예술 현장은 다 바뀔 거로 생각한다."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이향림 작가는 "우리 안에 병폐를 숨기고 있는데 남의 아픔에 공감을 하는 방송이 나올 거라고 보지 않는다. 이건 결국 시청자들에게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방송작가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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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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