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를 마시고, 야채수프를 먹으러 가고…. 마치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이 일상 속 평범함을 홍상수는 집요하게 스크린에 담는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 영화라고.

막걸리를 마시고, 야채수프를 먹으러 가고…. 마치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이 일상 속 평범함을 홍상수는 집요하게 스크린에 담는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 영화라고. ⓒ ㈜영화제작전원사


[기사 수정: 29일 오후 2시 13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감상하고 비평하면서 감독과 주연 배우의 사생활과 작품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홍상수 감독은 작품을 작품으로만 보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본인도 알았을 겁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실제 연출자인 감독과 실제 주연배우의 스캔들이 있기에 더 재미있는 영화이며 그 스캔들을 알아야만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는 장면들도 상당히 많은 작품입니다. 물론 홍상수와 김민희의 스캔들을 모르는 이라도, 영화 속 주인공 '영희'가 유부남 영화감독과 불륜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실제 홍상수-김민희 스캔들과의 관계 속에서 훨씬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만약 스캔들을 전혀 모르는 외국 관객들은 이 영화가 주려던 재미 일부밖에는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 일부만 가지고도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긴 했습니다만.

평범한 장면을 '영화'로 인식하도록

홍상수 영화답게 딱히 '내용'이랄 건 없습니다. 그냥 주인공들은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셔요. 극장을 나서면서 한 무리의 남성들이 "너무 지루하고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야채수프를 먹으러 간 식당 문이 닫힌 것을 보며 아쉬워하고, 점장이 암 투병 중이라는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삽니다. 우연히 만난 선후배 간엔 "선배는 젊어지셨네요", "너는 여전히 예쁘다" 같은 대화가 오가요. 지루하죠. 딱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가 없고요.

그러나 (늘 그랬듯) 홍상수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분은 홍상수 영화를 보고 '홈비디오 같다'고, '영화'가 아닌 그냥 '영상물' 같다고 이야기하더군요. 하지만 진짜 홈비디오들은 영화적이에요. 우린 결혼식이나, 아기의 재롱 같은 것을 주로 기록합니다. 야채수프 가게가 닫아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10분 이상 촬영해 굳이 간직하는 경우는 드물죠.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을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 이것이 홍상수의 작품 세계입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기죠.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을 스크린으로 보는 것이 어떻게 영화적 경험이 될 수 있는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매력적인 대답입니다. 홍상수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이지만 현실은 아니죠. 작품과 관객은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막을 두고 있어요. 이 막은 매우 얇지만 절대로 통과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영화 속에는 엔딩 크레디트에 '검은 옷 남자'라고만 소개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실존하지 않으나 화면 안에 등장해 홍상수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는 엔딩 크레디트에 '검은 옷 남자'라고만 소개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실존하지 않으나 화면 안에 등장해 홍상수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 ㈜영화제작전원사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는 주인공들이 실내에서 홍상수식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등지고 있는 배경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의문의 사내가 등장합니다. 창문은 닦으면 닦을수록 깨끗해지고 결국 창을 열었을 때와 닫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유사해지죠. 하지만 창문을 연 상태와 창을 닫은 상태는 결코 일치할 수 없습니다. 멋진 은유죠. 모든 영화는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이 영화를 '믿게끔'하려고 노력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이민 온 초능력자가 사이코 과학자가 만든 괴물과 싸우는 이야기조차 시나리오만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관객들은 믿어요.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스팸을 굽고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건 영화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일상과 영화의 경계에 씌워진 홍상수식 막(膜) 위에 홍상수 김민희 스캔들이라는 실제와 극 중 여배우 '영희'와 영화감독 '상원'이 겪고 있는 영화 속 현실의 '일치'를 대비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사실'은 아닌, 어느 영화 속에서 펄떡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김민희의 경지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주인공 '영희'는 객석에 앉아 관객들을 '본다'. 스크린을 사이에 둔 실제와 허구엔 아슬아슬한 균형이 생긴다.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주인공 '영희'는 객석에 앉아 관객들을 '본다'. 스크린을 사이에 둔 실제와 허구엔 아슬아슬한 균형이 생긴다. ⓒ ㈜영화제작전원사


좀 더 쉽게 예를 보죠. 앞서 저는 이 영화에 주인공이 친한 언니와 함께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고정된 앵글로 한참 보여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관객은 홍상수가 쳐놓은 현실과 영화의 은근한 거리감, 그리고 그것이 주는 영화적 긴장을 즐기며 두 여성의 '일상적 대화'를 지루하게 구경하게 되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그 남자 유부남이라며."

 김민희는 이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인다. 충분히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김민희는 이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인다. 충분히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 ㈜영화제작전원사


바로 이 순간 홍상수 세계를 만든 막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시종일관 차분하던 김민희, 아니 '영희'가 결국 술에 취해 '나더러는 불륜이라며 온갖 해코지는 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그 긴장은 극에 달합니다.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현실과 영화를 가로막은 '스크린'이라는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초조함이 생기는 거죠. 이런 긴장이 영화 내내 지속합니다. 그리고 배우 김민희는 이 모든 미세함을 기가 막히게 표현합니다. 그는 현재 배우로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 인상입니다.

많은 이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비평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 김민희 홍상수 스캔들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밝히더군요. 저도 왠지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보려 했습니다만…. 할 말이 없네요. 다만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 김민희는 베를린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죠.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능력' 이상의 무엇, 특히 윤리적인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녀의 베를린 수상 및 참석은 통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직업 배우이고, 좋은 연기를 했으며, 자기 능력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이 간단한 인과가 여성이란 이유로 성립되지 않는 경우들을 목격해야 하는 '한국 남자'로서, 전작 <아가씨>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레드카펫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그 아쉬움을 새삼 생각하며 글을 맺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동희 시민기자의 개인 누리집(www.kangdonghee.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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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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