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고양 오리온과 울산 모비스 경기에서 고양 추일승 감독이 지시하고 있다.

지난 17일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고양 오리온과 울산 모비스 경기에서 고양 추일승 감독이 지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NBA(미 프로농구)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지난 2012년 3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팀의 주축이던 팀 던컨을 특별한 부상이 없음에도 출전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당시 DNP(Did Not Play) 명단에 던컨의 이름을 올리면서 작성한 사유에는 생뚱맞게 'Old'라는 한 단어가 적혀있었다. 한마디로 '늙어서 쉰다'는 의미인데, 팬들은 뜬금없는 사유에 폭소를 터뜨렸다. 당시 36세이던 던컨의 체력안배를 고려한 포포비치 감독의 '농반 진반'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포포비치 감독은 장기레이스에서 연령대가 높은 주축 선수들의 체력과 부상 위험을 고려하여 철저히 관리하기로 유명했다. TV 전국 중계까지 예정된 마이애미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서는 던컨과 토니 파커, 마누 지노빌리 등 노장 선수들을 아예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고 일찌감치 비행기에 태워 샌안토니오로 돌려보냈다가 분노한 NBA 사무국으로부터 벌금 25만 달러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팬들을 위하여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프로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포비치는 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부득이한 결정이었다고 주장하며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KBL(한국농구연맹)에서도 최근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KBL은 지난 23일 재정위원회를 열고 프로농구 고양 오리온 구단에 경고, 추일승 오리온 감독에겐 견책과 제재금 500만원을 부과했다. 지난 22일 열린 KCC의 경기에서 오리온이 애런 헤인즈-문태종-이승현 등 핵심 주전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고 비주전 선수로 경기를 한 것이 일종의  태업성이라는 게 징계의 사유였다. 추일승 감독과 오리온 측은 전혀 고의가 아니었고 부상자가 많은 팀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KBL 규약 17조에는 '최강의 선수로 최선의 경기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 존재한다. 또한 70조에는 감독, 코치는 KBL 및 구단의 명예를 선양하고 모든 경기에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정규리그 2위 오리온은 이날 경기 전까지 KGC에 1.5게임차로 뒤져 사실상 자력 우승이 힘든 상황이었다. 정규리그 1위와 2위는 나란히 6강전을 거치지않고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KGC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오리온은 2위가 확정됐다.

오리온의 특성상 까다롭다고 판단되는 정규시즌 4위 울산 모비스(정규시즌 4-5위 승자는 4강에서 1위팀과 격돌한다)를 결승 전까지 피하려고 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어차피 4강 직행을 예약한 상황에서 굳이 정규시즌 우승을 위하여 무리하기보다는, 플레이오프를 대비하여 체력 비축을 위해 경기를 고의로 포기한 정황이 보인다는 게 KBL의 의심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결정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KBL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자칫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벤치의 고유권한에 대해서도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 레이스에서 선수들의 체력 안배와 부상자 관리는 필수다. 정규시즌 막바지 순위가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에서 그동안 출전 시간이 적었던 식스맨들을 많이 활용하고 느슨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으로 여겨져왔다. 전략적으로 크게 의미가 없는 경기에서 공연히 주축 선수들을 무리해서 뛰게 했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플레이오프에서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고 소속 구단으로서는 이래저래 손해다.

단지 벤치 멤버들을 기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기준으로 접근하면 경기에 많이 뛰지 않은 선수들에게 돌아가야 할 한정된 기회마저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주전 혹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많은 국내 프로농구의 실정을 무시한 결정이라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선수층이 얇은 KBL에서 구단이 장기 레이스를 대비해 탄력적으로 선수단 운용은 필수인데, 이를 연맹이 일일이 제약하려든다면 어떤 감독도 제대로 팀을 운영하기 힘들다.

NBA에서도 '프로로서 항상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과 '선수단 운영은 현장의 고유권한'이라는 주장은 끊임없이 충돌하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한 포포치비 감독과 샌안토니오의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선수 관리 문제를 들어 사무국과 구단들이 갈등을 빚는 경우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골든스테이트, 클리블랜드 등 우승권의 강팀들은 장기 레이스에서 휴식을 이유로  몇몇 경기에서 주전들을 제외하고 휴식을 줬다가 NBA 사무국으로부터 경고 혹은 벌금 징계를 받기도 했다. 아담 실버 NBA 커미셔너는 휴식을 이유로 사전 통보없이 구단들이 주축 선수들을 제외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프로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며 앞으로도 사무국 차원에서 징계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의 구단과 감독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NBA는 정규시즌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려 82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리그다. 미국의 특성상 장거리 원정과 백투백 경기도 일상적이다. 일정이 꼬이면 어떤 팀들은 약 2주 사이에 원정 경기만 7~8경기 이상 소화하며 대륙을 돌아다녀야 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기도 한다. 일찌감치 사전 휴식을 예고하는 것도 오히려 특정팀과의 담합 논란이나 관중 동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KBL의 경우 단순히 일정상이나 선수관리의 문제를 떠나 또다른 민감한 배경이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 바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한 아픈 추억이다.

KBL은 과거 몇 차례 유명 선수와 심지어 감독까지 포함된 승부조작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바 있다. 강동희 전 원주 동부 감독은 승부조작 혐의로 영구제명까지 당했다. 또한 공식적인 승부조작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신인드래프트 상위순번을 얻기 위한 플레이오프 탈락팀들의 고의 태업과 '탱킹' 논란, 2004년 개인타이틀을 놓고 벌인 김주성, 문경은, 우지원 등의 기록 몰아주기 논란 등도 KBL의 신뢰도 하락을 초래한 어두운 흑역사들이다. KBL은 당시 아무런 대응책도 내놓지 못하고 사태를 무기력하게 방치했다고 엄청나게 욕을 먹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KBL의 이러한 '감시 체계'가 상징적으로라도 일단은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실제로 오리온의 징계가 도마에 오르기 전부터 일부 농구팬들은 다른 몇몇 구단들에 대해서도 선수교체, 작전타임 등을 두고 석연치 않은 경기운영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구체적인 근거보다는 추측과 의심에 치우친 내용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프로농구에 대한 팬들의 불신이 아직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징계보다는 팬들의 신뢰와 기대를 회복하기 위한 농구계 차원의 자발적인 혁신 노력이 더 절실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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