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즌>에서 익호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영화 <프리즌>에서 익호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모처럼 제대로 된 악역이다. ⓒ 영화사 하늘


때로는 가슴 울리는 순애보로, 때론 강렬한 액션으로 한석규는 그렇게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으로 지난 27년을 지났다. 그를 수식하는 대표작만 해도 십여 편이 넘는다. 최근엔 의학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로 한창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않았나. 그의 경력보다 더 경이로운 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의 연기력이다. 모처럼 강한 변신을 꾀한 작품이 있으니 바로 23일 개봉을 앞둔 <프리즌>이다.

철저하게 이 작품에서 그는 악인이 됐다. 그가 맡은 장기수 익호는 닫힌 공간에서 수감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심지어 외부 고위 인사들의 청탁을 받아 청부살인까지 진행한다. 양지의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말 그대로 음지의 지도자다.

난장판

물론 악역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 <주홍글씨>(2004)와 <구타 유발자들>(2006)에서도 그는 비열함의 끝을 보인 적이 있다. <프리즌> 속 익호가 다른 점은 스스로 당당하며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라는 것. 이를 두고 한석규는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영화에 나오는 교도소는 세트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장흥교도소였고 철거 예정이었다. 그곳을 섭외해서 아주 그냥 판을 벌일 수 있었지. 장흥군수님이 한 번 왔었다. '이대로 버리긴 참 아까운 건물'이라고 하시더라. 감옥 체험관으로 써도 될 법했다. 진짜 감옥엔 처음 들어가 봤는데 실감이 나더라. 벽에 낙서도 그대로고, 엽서나 죄수들이 쓰던 물건들도 나뒹굴고 있었다. 

왜 이 작품을 하게 됐을까. <비밀의 문>에선 제가 영조를 했잖나. 왕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친구 중 장남이 많은 편인데 아버지들과 사이가 안 좋더라. 왜일까. 외국인들은 또 그런 게 없더라. 유교적 사고에 의해 한국에서 유독 부자 관계가 그런 것 같았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을 통해선 지도자의 마음,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백성을 어엿비 여겨 문자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을 세종은 직업적으로 구현한 거지. <낭만닥터 김사부>도 직업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에 비해 <프리즌>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그 탐욕을 익호라는 인물을 통해 만들어 보고 싶었다. <뿌리 깊은 나무>를 할 때 읽었던 <군주론>도 그 저자 자신이 왕에게 재등용되기 위해 쓴 거지 않나. 그것 역시 탐욕이다."

 영화 <프리즌>의 한 장면.

영화 <프리즌>의 한 장면. 익호를 따르는 무리들, 그를 제거하려는 무리들이 겨루기 하는 장면도 영화의 볼거리다. ⓒ 쇼박스



권력의 속성

그 탐욕에 대해 더 얘기하고자 했다. 세상이 죄인이라 치부할지언정 익호는 분명 또 다른 그들의 세계에선 '군주'였다. 평온해 보이다가도 지배질서를 어지럽히면 어김없이 응징하고, 때로는 수감자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아량을 보이기도 한다. <프리즌>은 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자와 순응하는 자 모두를 담아낸다. 어차피 현실에서 배척당한 죄수들에게, 특히 익호에겐 교도소는 파라다이스 아니었을까.

"죄수들의 본래 목표는 형을 마치고 나가는 건데 익호는 그게 아니었다. 출소가 목표가 아니다. 그러니 교도관이 나가라고 하면 그 난리를 피우잖나. 안에서 바깥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나갈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왜 그게 가능하게 됐을까. 이게 바로 감독의 주제 정신 아닐까. 영화 제목이 <프리즌>인데 본래 소제목으로 '영원한 제국'이라고 한 마디가 더 있었다. 그걸 같이 관객분들이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이걸 통해 권력이라는 걸 얘기해보고 싶었다. 권력과 인간. 너무 거창하긴 한데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권력 이런 건 아마 인간사 문명사가 있는 한 쭉 이어질 거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생기는 거지. 해결될까? 나도 그 답을 모르겠다(웃음)."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면서 일단 입을 떼면 쭉 길게 말을 이었다. <프리즌>이 분명 그에겐 하나의 도전이었지만 한석규는 "가능하면 고통보다는 사랑이나 희망을 연기로 얘기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 과정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나왔다. 여전히 한석규에겐 아른거리는 작품이었다. "가족, 사랑, 우정, 죽음 등 추상적 단어를 다룬 영화인데 굉장히 희망적 시선이 담겨 있다"며 "이런 영화가 지금의 환경에서 과연 제작될 수 있을까?"라 되묻기도 했다.

 영화 <프리즌>의 한 장면.

영화 <프리즌>의 한 장면. 극중 유건(김래원 분)은 유독 익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 쇼박스


연기의 이유

그의 추억 회상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말 그대로 한석규는 1990년대 한국영화의 1차 부흥기를 이끌던 배우 중 하나였다. 스스로도 "현재를 연기하는 게 배우라면 그걸 위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해당 인물의 과거를 만들곤 한다"며 "그래서 과거 이야길 많이 하는 것 같다"고 인정했다.

"젊었을 땐 뭔가 '해낸다', '완성시킨다'라는 목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지금은 그것보단 '한다'라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지. 영화적 환경은 1970년대든 1990년대든, 2100년이 와도 비슷할 것 같다. 근데 난 영화라는 매체는 언젠가 없어질 것 같다. 각종 기술이 밀접한 매체인데 기술이 발전할수록 영화는 설 자리가 없지 않을까. 다만 연기는 안 없어질 거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눈, 그건 속일 수 없거든. 나도 내 연기를 볼 때 내 눈을 본다. 관객들도 그럴 거다. 눈은 CG로 처리할 수 없다. 그래서 무대 연기가 중요하지.

25년을 넘게 했으니 나도 연기를 꽤 했지. 언제부턴가 내가 뭐 하는 사람인가 생각을 많이 했다. 연기자, 배우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잘 안 쓰려고 하는데 배우가 대체 뭔 뜻일까. 한자를 보면 아닐 비에 사람 인이다. 사람이 아니다? (웃음) 유교적 관점에서 배우는 원숭이처럼 꽥꽥거리는 사람이다. 사실 연기라는 게 일본을 거쳐서 온 문화잖나. 우린 마당놀이 이런 걸 했으니 딱히 이름 붙일 건 없었겠지. 일종의 신조언데 아무리 생각해도 배우가 하는 일에 대한 답이 단번에 안 나오더라. 의사는 고치는 사람,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인데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 사회적 맥락에서 답이 명확하질 않다.

연기는 왜 하나 자꾸 파던 시기에 만난 게 <낭만닥터 김사부>였다. 사람은 일로 완성되는데 그 일의 목표를 생각 안 하고 살기 마련이잖나. 그러다 보면 오답을 내기도 하고, 직업의 목표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게 문제다. 예수님, 부처님도 진리를 전할 때 그렇게 어렵게 얘기했을 거 같진 않다. 아, 그런데 내가 이렇게 어렵게 말하고 있네. 어휴 쯧쯧. (웃음) 예를 들어 <낭만닥터>의 도 원장(최진호 분)은 가짜 의사다. 허구에 정신 팔려 살다 본분을 왜곡한 인물이지."

한석규의 배우론엔 이처럼 자신이 왜 연기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깔려있었다. 왠지 해탈한 것처럼 보인다. 한석규가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 욕심 많은 사람이다. 나이 먹길 기다렸다"고 그가 말했다. "다른 연기자랑도 당신은 어디까지 몰입하는지 얘기해보고 싶다"며 그는 눈빛을 밝혔다. 여전히 그는 연기적 에너지가 충만해 보였다.

나이 들길 기다렸다는 그의 말은 곧 앞으로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말의 동의어다. 지치면 쉬었고, 충전되면 가열 차게 달린 그다. 여전히 그는 막이 오른 무대 위에 서 있다.

 영화 <프리즌>에서 익호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 영화사 하늘



한석규 김래원 프리즌 낭만닥터 김사부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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