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작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고 난 후 문득 장 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이 떠올랐다. 소설 속 챕터를 드골부터 시라크까지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의 대통령 이름으로 대신했던 책. 그래서 주인공 폴 빌릭은 드골 시대로부터 시라크 시대까지 나고 자라고 가족을 이루며 나이 들어갔지만, 그의 삶이 그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야다.

마치 영화 속 토니 에드만은 독일 버전의 나이든 폴 빌릭 같았다. 오랫동안 외도를 했던 아내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고 그의 딸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런 상황에 대해 '속수무책'인 아버지 폴 빌릭. 물론 <토니 에드만> 속 딸은 자폐증도 정신병도 아니지만, 아버지인 토니 에드만이 보기엔 그에 버금가게 심각해 보이고, 아버지는 그런 딸의 모습에 폴 빌릭만큼 '망연자실'해한다. 하지만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며 <프랑스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녀의 갈등이 결국 아버지의 세대와 딸의 세대라는 시대적 충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개인의 삶이라는 것조차도 결국은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만 그 형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동적으로 규정된다면 '인간'이겠는가? <토니 에드만>의 미덕은 그런 '피동성'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어설픈 토니 에드만의 부정(父情)에서 비롯된, '그럼에도'에 있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폴 빌릭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는 대책 없이 적극적으로 딸의 인생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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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 놓고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보다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 장 폴 뒤부아, <프랑스적인 삶> 중에서

살짝 이상한 아버지, 너무나도 멀쩡해서 문제인 딸 이네스 

아버지 빈프리트의 집에 찾아온 택배 기사, 하지만 그 택배 기사를 맞은 아버지의 행동은 어딘가 영 '정상적'이지 않다. 다짜고짜 틀니를 끼고 가발에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 빈프리트는 다른 사람인 척하며 너스레를 떤다.

굳이 이상한 가발이나 틀니를 끼지 않아도 가슴에 찬 심장 박동기가 울리는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추레한 외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유용함'이 사라진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가 이혼한 아내의 집에서 오랜만에 딸과 조우한다.

병든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조차 없다는 딸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눈도 마주칠 시간 없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버지.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아버지가 그 '지그시'의 선을 넘어서면서부터이다.

딸은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조차 시간이 없다며 비서를 대신해 응대할 정도로 사무적이다. 그러던 딸이 아버지가 보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는 반응한다. 마치 사람이 죽어 나가도 무심히 거리를 지나는 현대인들이 몸개그에 관심을 보이듯. 더구나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이제 막 체결을 앞두고 거기에 온 신경을 쏟는 딸의 빈틈없는 일상을 자꾸 헤집고 들어오며 불편하게 한다. 심지어 한바탕 퍼부은 딸과 헤어진 그는 예의 틀니와 가발을 뒤집어쓰고 '토니 에드만'이라며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영화 처음부터 보여준 아버지의 '코미디'는 사실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있노라면 그의 코믹한 설정은 어쩐지 불편하다. 심지어 그가 주워섬기는 거짓말들은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그 기묘한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틈을 만들어 낸다.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딸과도, 딸이 계약하고자 했던 대표와도, 딸의 주변 사람들과도.

영화 속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이젠 뒤편으로 밀쳐진 세대이고, 그중에서도 외양으로 보면 가장 뒤처져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꼰대' 스러움으로 표출하는 대신 파티에 온 피에로처럼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세상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일부 어르신들이 보이는 '어처구니' 없음과 다르게 또 다른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아버지가 애써 거짓말까지 해대며 만들어 내는 '실소의 공간'을 빽빽이 채워가는 건 오늘날 현대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딸의 삶이다. 루마니아와 독일 기업 간의 체결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인 이네스는 계약의 성공을 위해서 루마니아 기업의 집단 해고 정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과 계약하면 자신들이 나서서 '해고'를 해주니 좋다는 식이다. 가족 간의 관계도,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의 문제도,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루마니아라는 나라의 처지도 그 모든 것은 그녀의 '계약 성공'이라는 블랙홀 안에 무기력하게 빨려 들어간다.

아버지의 해프닝은 영화 중반까지는 내내 불편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철갑을 두른 듯한 딸의 일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 간다. 딸은 그녀에게도 '눈물'이 아직 존재함을 스스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간 낯선 루마니아 가정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love of all'을 열창하고 만다. 이제는 잊힌 어린 시절 그 언젠가 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불렀던 그때처럼. 그리고, 자신을 옥좼던 그 꽉 조인 옷과 신발을 훌훌 벗어 던진 채 동료들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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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영웅을 찾고 있죠.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필요한 거예요.

전 저를 채워줄 사람을 찾지 못했죠.
세상이란 외로운 곳이에요.

그래서 전 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맹세했죠.
누군가의 그림자 속을 걷진 않겠다고.

(중략)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에요."

성공적인 삶, 그리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

이네스가 절규하듯 부른 'The greatest love of all'은 이네스 세대의 절규다. 아버지 세대가 일구어 놓았다는 세상이 그녀들에게 물려준 건 '성공과 경쟁이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북받침을 참지 못했듯이, 우리 자신도 과연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토니 에드만이 된 아버지는 마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서의 인간의 정의를 되묻는 듯하다. 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저런 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이 부러웠다. 자신의 세대를 허투루 살아오지 않은 아버지 세대의 당당함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토니 에드만>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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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토니 에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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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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